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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에 해당되는 글 32건
2008/11/12 09:27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녔을 적, ‘공부를 한다’는 것은 곧, ‘문제집을 푼다’의 의미였다. 그랬다.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한 수단’ 이외에는 어떤 것도 공부로 인정받지 못했다. 공부는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었으며,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었고, 세상에 의문을 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지금은 다를까? 아니, 그보다 먼저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것, 여행을 가는 것, 불순한(?) 질문을 품는 것’이 어떻게 공부일 수 있지?


 맞다. 질문을 한 당신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지니고 있는 공부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맹모도 울고 갈 한국 어머니의 ‘교육열’에 관한 책들을 보면, ‘공부’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지를 단번에 드러낸다. 『조기유학으로 성공한 엄마표 자녀교육』, 『민사고 부모들의 특별한 자녀교육법』,『하버드, 엄마가 먼저 준비해라』등 제목만 봐도, 한눈에 ‘한국의 맹모’들이 생각하는 공부가 무엇인지 보여주지 않는가?


 그렇다, 한국 사회에서 ‘공부’란 어렸을 적에는 조기 유학을 가고, 조금 커서는 특목고에 가고, 그 다음에는 명문대를 가는 것이다. 앞으로는 이 ‘한국표 공부코스’에 특목중이 추가될 것이다. 하긴, 이제는 미국 초등학교에 가는 비법이 담긴 책도 출간했으니 ‘특목중’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표 공부코스’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미국 초등학교에, 특목중․고에 명문대를 가려 하는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일까? 당신도, 나도 답은 이미 알고 있다. 바로, 돈과 지위다. 그것을 보다 많이, 보다 높이 얻기 위해서 ‘성적을 올리기 위한 공부’에 대한 열기가 맹모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욕망의 교육’은 앞으로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 2008년 10월 말, 광주에서는 겨우 열 살짜리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입시 스트레스로 자살을 했다. 이것은 나약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일인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한 번 생각해보시라.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이러한 입시로 인해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한 기억이 있는가? 욕망으로 점철되고 왜곡된 공부는 어느새 우리들의 목숨을 조여오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욕망의 공부’가 아니라, ‘성장의 공부’가 되어야 한다. 돈과 지위만을 위한 ‘성적 올리는 공부’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부를 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제대로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학생들은 ‘입시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을 뿐이지, ‘공부’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 하냐고? 간단하다. ‘학교와 성적을 벗어난 공부의 공간’을 바라보면 깨달을 수 있다.


 욕망으로 왜곡된 공부가 싫어서, 제대로 공부를 하고 싶은 이들이 모인 공간은 찾아보면 많다. ‘하자 센터’라고 들어보셨는가? 그곳에서는 ‘학교와 성적’을 넘어서는 뛰어난 공부의 공간이 펼쳐진다. ‘랩’과 ‘DJ’ 교육, 영상 및 방송 교육, 문화 기획자 교육 등 학교에서는 공부라고 불러주지 않는 것들을 배운다. 또한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는 매일매일 깊고 넓은 질문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서양의 고전들을 읽어가면서 ‘세상에 의문을 품는 행동과 고민’을 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하자센터에서 뛰어난 ‘공부 열정’을 보이는 이들은 ‘학교가 규정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수유너머에서 대학원생도 어렵다는 철학 세미나를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한 학생은 학교에서 꼴찌를 다투었던 경력이 있는 학생이었다.


 이렇듯 ‘진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성장’을 일으키는 것이다. ‘욕망의 공부’를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한 이들, 사회지도층이 보여주는 작태는 어떠한가? 그 ‘어린 욕망’은 공부를 첫 시작한 그대로 ‘눈곱만큼도 성장’하지 못했다. 이런 사회 현실은 과거에도 있었다. 그에 대해 조선 시대의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은 자경설(自警說)에 아래의 글을 남겼다. “과거 시험을 위한 공부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지만 공부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그만둬야 한다.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온 정신과 힘을 거기에 쏟아 붓느라 진정한 학문을 방해할 것이 아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온 정신과 힘’을 어디에 쏟아 붓는지 되돌아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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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4 23:13

트루먼 쇼는 트루먼‘만’의 쇼가 아니다.

_ 트루먼 쇼에 담긴 감시 사회의 여러 기제들



트루먼 쇼, 그 속에 담긴 ‘감시 사회’를 생각해보자.


 트루먼 쇼의 감독 피터 위어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로 유명하다. 그 영화를 통해 피터 위어는 우리는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쳐 질문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그 질문에 짧은 탄성을 질렀으며, ‘죽은 시인의 사회’는 명작으로 많은 이들이 사랑을 받고 있다.


 바로, 그 감독이 만든 영화 중 하나가 ‘트루먼 쇼’이다. 트루먼 쇼는 한 인간의 실제적 생애를 프로그램의 통제 하에, 24시간 방송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영화가 개볼 될 당시(1998)에도 참으로 오싹한 생각이었으며, 지금(2008) 그 느낌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극단적 상황 연출 속에서 피터 위어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죽은 시인의 사회’ 속에서는 교육 혹은 인생에 대한 생각 더미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물론, ‘트루먼 쇼’도 한 가지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대중 매체, 소비문화, 감시 사회 등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가 담겨 있다.


 그 여러 가지 중에서 이번 글의 핵심은 ‘감시 사회’이다. 트루먼 쇼가 계속 이루어지기 위해 수많은 ‘감시 기제’등이 이용되는 데, 몇몇 것들은 어쩌면 이미 우리에게 적용될 지도 모르는 섬뜩한 것들이다. 트루먼 쇼를 보며, 영화 속 트루먼의 얼굴에서 우리의 얼굴이 겹쳐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너무 큰 비약일까?


 사실, 감시 기제는 우리가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감시기제는 일상 속에서 익숙해진다. 그러기에 ‘감시 기제’를 파악할 수 있는 탐지기가 필요하다. 그 탐지기로서 홍성욱 씨가 지은 『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이라는 책을 이용해 보자. 자, 그럼 ‘트루먼 쇼’의 감시 기제를 찾아서 출발!


트루먼을 보고 있는 수많은 ‘시선’


 감시의 가장 기본은 바로 시선이다. 사람을 가장 잘 묶어 놓을 수 있는 감각은 ‘시각’이며 그 시각을 통한 시선이 감시의 첫 단계인 것이다. 벤담이 설계한 파놉티콘도 결국은 시선을 이용한 감시 기제였다. 파놉티콘 안에 있는 이는 밖에 있는 이를 보지 못하나, 밖에 있는 이는 안에 있는 이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구조. 바로, 이게 푸코가 말한 ‘시선의 권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트루먼 쇼는 그러한 시선 구조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어떻게 되는 지를 보여준다. 트루먼이 살고 있는 ‘삶의 공간’ 자체가 ‘파놉티콘화’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서 ‘파놉티콘’이라는 감옥 속에 굳이 집어넣지 않아도, 삶의 모든 공간이 ‘파놉티콘’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일상의 파놉티콘’이라고 정의해 보자. ‘일상의 파놉티콘’속에서 트루먼은 결코 자신이 감시당한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다. 이것은 벤담이 설계한 파놉티콘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벤담은 감시당한다는 ‘인식’속에서 한 개인이 태도가 바뀌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트루먼 쇼의 파놉티콘은 그러한 ‘인식’을 없애버린다.


 왜냐? 그것은 ‘파놉티콘’ 밖에서는 감시할 수 없는 벤담의 상황과는 달리, 트루먼 쇼에서는 ‘어디서든’ 감시를 할 수 있기에 통제에 그 무엇보다 자신이 있는 것이다. 파놉티콘 밖에서 ‘자발적인 감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어디서든 ‘비자발적인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있는 것. 그게 트루먼 쇼에서 보여 지는 일상 속의 파놉티콘의 모습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권력 구조 속에서 가장 약한 부분에 위치해 있다. 보여 지기만 하는 존재로서, 비대칭 시선의 극단에 서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일상 속의 파놉티콘’은 트루먼의 경우‘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감시기제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 속에 묻힌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하기 어렵다. 즉, 비단 ‘트루먼 쇼’뿐만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간단한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우리는 길거리의 CCTV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우리의 인생 중 일부를 모니터를 통해서 ‘보고 있다’. 이렇듯, 시선이란 권력적인 것이고 시선을 받고 있는 이에게는 강력한 감시 및 통제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시선, 그 다음엔 ‘기록과 정보’의 통제


『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을 보면 시선 이후에는 기록이 발전하고 그에 따라 정보를 이용한 감시 시스템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가장 ‘시선’적인 감시가 드러나는 트루먼 쇼에서도 기록과 정보를 통한 감시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드러난다.


 트루먼 쇼를 하면서 트루먼의 일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방송을 통해 ‘보여진다’. 근데 그 뿐만이 아니다. Tv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트루먼의 일생은 ‘기록되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트루먼 쇼를 처음부터 30년 동안 했던 PD의 지위에 가까운 크리스토프는 트루먼에 대해 ‘그 누구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 굳이, 크리스토프 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열심히 트루먼 쇼를 시청했던 시청자 또한 ‘트루먼에 관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트루먼의 첫 키스를 누구와 했는지, 어떤 버릇을 가지고 있느냐의 것들이 ‘정보’가 되어서 트루먼 삶의 패턴을 ‘드라마 미래 예언하기’와 같이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순간’적인 시선을 넘어서, 기록을 통한 정보는 감시를 매우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역설적이게도 트루먼은 ‘기록’과 ‘정보’를 통해서, 트루먼 쇼라는 자신을 둘러싼 파놉티콘을 감시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이동 패턴을 천천히 살펴본다거나, 과거의 흐릿한 정보들을 첫사랑의 옷이나, 아버지와의 사진 등을 통해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 ‘기록’과 ‘정보’는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트루먼 쇼에서 비치는 구체적인 감시 모습들


 시선, 그리고 정보에 대해서 포괄적인 감시 사회를 살펴보았다면, 트루먼 쇼에서 비치는 보다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자. 사실, 트루먼 쇼 자체가 하나의 큰 감시기제라 다른 감시 기제와 따로 말하기가 애매한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어떻게 트루먼 쇼는 트루먼’을 감시하는 가를 중심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사람들 사이의 상호 감시는 가장 눈에 띄는 감시이다. 상사, 동료, 경찰, 버스 기사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내와 10년 지기 친구까지 모두 트루먼을 감시하는 감시기제이다. 물론, 트루먼 쇼라는 설정 상 극단적인 측면으로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그것도 한 가지 목적으로 감시하는 특징이 있기는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감시 기제는 우리 사회에서는 ‘트루먼 쇼’의 방송이 아닌 ‘사회 안전’ 혹은 여러 다른 이유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방향이 한순간에 달라지는 순간, 트루먼 쇼에서 나온 것과 같은 끔찍한 감시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트루먼 쇼에서 사람의 눈만큼 가장 많은 게 카메라다. 이렇듯, 전자기기를 통한 직접적 감시도 엄청나게 이루어진다. 쉽게 말해서, 카메라가 보지 못하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할 정도이다. 게다가 이런 모습들은 점점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각종 CCTV가 있는 공공장소가 얼마나 많은가. 감시의 목적과 감시의 주체 그리고 그 정도가 다를 뿐이지 실제로 조금씩 우리 삶에 전자기기를 통한 감시는 늘어가고 있다.


 그렇게 촬영한 방송은 위성을 통해 세계적인 감시 시스템으로 발전한다. 트루먼 쇼를 보고 있는 시청자는 세계적이다. 바로 위성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송출하기 때문이다. 위성을 통해서 감시가 세계화 되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아, 물론 트루먼 쇼는 감시가 아니라 세계인의 ‘오락’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트루먼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감시이다. 그렇게 세계적인 감시가 된 트루먼 쇼는 마침내 여러 국가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세계화 된 감시는 국가 간의 협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트루먼 쇼를 통해 맛 본 감시사회에 대해 고민할 것 2가지


 지금까지 보았듯, 트루먼 쇼에서는 감시사회의 일면이 담겨 있다. 쉽게 말해, 트루먼 쇼는 트루먼 ‘만’의 쇼가 아니라 우리의 쇼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실질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떻게 하면, ‘역파놉티콘’을 구성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건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이 ‘트루먼 쇼’라는 파놉티콘을 보고 기록하고 정보를 통제할 수 있어서 마침내 그 감시를 역으로 감시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 속에서 수많은 ‘크리스토퍼’를 인식하고 함부로 우리를 통제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둘은 보여 져서도, 기록되어서도 안 되는 것들에 대한 성찰이다. 간단히 말해, 프라이버시권을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다. 시선을 넘어서 정보를 통한 파놉티콘 사회는 날로 심화되는 데, 우리가 쉽게 노출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권리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은 세트장의 세상을 벗어났다. 그러나 그 세트장 너머의 세계에서도 감시는 빈번히 일어난다. 트루먼은 그때 어떻게 대처할까. 우리들은 트루먼 쇼보다 더 큰 ‘또다른 쇼’의 현실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은 끝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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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Icon 최십리 | 2008/10/26 04:15 | PERMALINK | EDIT/DEL | REPLY
파놉티콘을 배울 때 어찌나 섬뜩하던지. 논술 할 때 마지막 서론에서 역파놉티콘에 대해 썼었건만 아직도 어렵네요...
BlogIcon 여울바람 | 2008/10/27 21:20 | PERMALINK | EDIT/DEL
요즘에는 '편리하잖아?'라는 말 한마디에,
누구나 자유로이 '파놉티콘'에 들어갈 자유를
환호한다는 점이 미묘하달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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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4 10:58

대학생, 현 정부의 언론정책을 고민하다.

- 중앙대에서 대학생 대상 언론정책 강연회 열려

▲ 현 정부 언론정책에 대해 강연 하고 있는 양문석 사무총장

 예로부터 대학생은 사회의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근, 언론의 고비에 대학생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 11일 중앙대에서는 릴레이 강연회〈특명, 언론을 긴급구조하라!>의 1부가 열렸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양문석 사무총장이 강연자로 나와 주로 지상파 공영방송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며 현 정부의 민영화 정책을 비판했다.


 이 강연회는 전국언론노동조합의 후원 아래, 대학생이 직접 기획 및 홍보를 했다. 총 2번의 릴레이 강연 형식으로써 이루어져 있고, 이번 14일에 중앙대에서 2번째 강연이 열릴 예정이다.


 릴레이 강연의 처음을 장식하는 강연에서, 양문석 사무총장은 지상파 공영방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현 정부의 1공영 다(多)민영 계획을 비판하면서 1공영 다민영 체제는 공영방송이 민영방송의 선정성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구조이며, 그에 비해 다공영 체제는 민영방송이 공영방송의 높은 질을 따라가는 구조라고 말하면서 다공영 체제를 지켜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 외에 현 정부의 언론 정책인 코바코 해체와 민영 미디어랩 도입, 신문․방송 겸업 허용 등의 내용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강연을 들으러 온 대학생들도 양문석 사무총장이 지적하는 문제의식에 대체로 동의하며 여러 질문을 쏟아내었다.


 다음 번 강연은 지상파 공영방송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KBS 최용수 PD가 강연을 한다. 14일 오후 3시 중앙대에서 열린다. 릴레이 강연의 2번째 강연의 주제는 KBS 시사프로그램에 대한 의의와 필요성이라고 한다.


- 여울바람 기자(flowiqzero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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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3 04:01
* 이 글은 "우주를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사랑’, 그리고 ‘인간’-<플라네테스>"를 읽고 쓴 글 입니다.

 
 내가 흥미로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친구. 그가 재밌는 글을 썼다. 내용인 즉슨, <플라네테스>라는 '애니메이션'을 매개로 한 '던져져 있음'과 '이어져 있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다. 실존주의의 명제, '(홀로) 던져져 있음.' 그것은 우리의 삶에 많은 시사점을 주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 실존주의처럼, 서양의 사고가 주로 '존재론'을 기반으로 해왔다면, 동양의 사고는 '관계론'이 주를 이룬다. 그 명제는 '이어져 있음'이다. 이 물과 기름 같은 사고가 서로를 보완해야 함을 짧은 대화로 하였고, 그 '주제'를 이용하여 <플라테네스>라는 애니메이션을 풀어내었다. 그 글을 읽으니 나도 무언가 말을 내뱉고 싶어졌다. 나에게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고'니까. 그러므로 아래 글은 내 짧은 식견에서 나오는 질문이라 할 수 있겠다. (덧붙여, 이런 생각의 꽈리를 잇게 만든 친구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잘난 녀석들의 한 마디.
"인생은 혼자 사는 거야."

 "아그야-_-, 인생은 혼자 사는 거야." 라는 말. 바로, 잘난 녀석들이 입에 항상 물고 다니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만화에서도,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꼭 이런 말을 하는 녀석은 잘났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 가히, 어느 종교의 책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기라고 믿는 것이다. 하긴, 그걸 믿을 정도 되려면 잘났거나 잘났다고 타인이 세뇌했거나 둘 중 하나겠다만.

 좋다. 인생 살이라는 거, 결국은 '홀로 걷는 것'이라는 것까지 부정할 마음은 없다. 그런데 말이지, 홀로 걷는 길 옆에서 걷고 있는 이는 뭔가? 그건, 사람이 아닌 풍경인가? '인생 살이'는 홀로 걷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인생'이라는 것은 홀로 걷는 길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사람'의 '홀로 걷는 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길이 하나 둘 모이고 모여서 '인생'을 만든다.

 (홀로) 던져진 이는 '홀로'가 아니라, '여럿'이다. 그렇다면 그건, (홀로) 던져진'이들'이 된다. 이게 무슨 요상한 말 장난이 아니다. 인생은 혼자 사는 거야. 라고 잘난 녀석이 지껄일 때, 맞아 난 홀로 사는 거야 라고 끄덕이는 많은 사람은 '세상에 유일하게 (홀로) 던져진 이'가 될 수가 없다. 말 늘어지기가 이해불가라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가을에 고독함을 느끼는 외로운 '쏠로'. 오, 그것은 나의 이야기라고 느끼시는가? (난 그렇다. _-_) 당신에게 세상이 붙여주는 이름이 있다. '쏠로 부대'. 다시 말해, 당신은 '쏠로이되 홀로가 아니다'. 인간은 세상에 (홀로) 던져졌고, 그 옆에도 그 옆에의 옆에도 (홀로) 던져진 이가 있다. 당신이 그들을 '나와 무관한 기계 덩어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홀로) 던져져 있음'은 함께 (홀로) 던져진 인생으로 '이어진 인생'인 것이다. 그럼, 이건 던져져 있음일까, 이어져 있음일까. 그 질문은 잠시 접어두고, 계속 글을 읽어보라.

사랑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사랑, 그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홀로) 던져진 삶에 (함께) 하나된 삶으로의 극적인 전환? 외로움에 죽기조차 하는 인간에게 있어 사랑은 하나의 구원일지도 모르겠나. 인간'들'에게 있어서 사랑이 구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나와 하나가 합쳐서 또다른 하나가 되기도 어려운데, 수많은 이와 수많은 이가 하나로 될 수 있을까? 틀림없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틀 속에서 '사랑은 세상을 구원할 수 없어'라는 대답이 나오게 된다.

 맞다. '그러한 사랑'이라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 같다. 그런데, 사랑이란 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어져 있음' 속에는 '관계'만이 있고, '존재'는 없는 것일까? 다시 말해,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내가 사랑의 부속품이 되어서 나를 '잊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을거라고 본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생각하는 이는 나뿐만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보면 이러한 구절이 있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내가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집착한다면, 그 또는 그녀는 생명을 구조하는 자일 수는 있지만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된다.> 에리히 프롬도 '존재'가 없는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사랑은 '유일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다양한 하나'가 되는 개념이다. 아니, 어쩌면 '다양한 여럿'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 말은 '사랑'의 원리는 '복잡하고 다양한 세상'에 적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일찍이, 동양에는 묵자라는 이가 '겸애' 사상을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원리로 이해했다. 이렇듯 사랑은 '관계'만 가득한 게 아니라, 그 속에는 '존재'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건, '이어져 있음'인가, '던져져 있음'인가?

'홀로'와 '함께'는 짝궁이다.

 2가지 생각을 통해서, '던져져 있음'과 '이어져 있음'이 딱 잘라 나누기가 힘든 것임을 살펴보았다. 나누기가 힘든 것을 넘어서, 서로가 서로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다. 세상은 (홀로) 던져진 인생이라는 것을, 또 다른 (홀로) 던져진 인생을 통해서 알 수가 있고, 사랑이라는 '이어져 있는 행복'은 서로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결코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다 새로운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존재론'과 '관계론'의 파편화 된 생각의 틀. 그것을 깨야 한다. 그래야만 보다 인생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을 테니까. 관계 없는 존재'들'의 모습도, 존재가 없는 관계'만'의 모습도 상상 속의 세계일 뿐이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삶. 그것이야 말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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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mund | 2008/10/13 20:07 | PERMALINK | EDIT/DEL | REPLY
고마울 것 까지야...ㅎㅎ
BlogIcon 여울바람 | 2008/10/14 20:05 | PERMALINK | EDIT/DEL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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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30 20:24

10대(와) 대화(하기) 기술 비전서(祕傳書)

- (배)경 편


 본 글은 10대 대화 기술 비전서 중 일부분이다. 예로부터(서기 1945년 8월 15일 이후부터) 10대와 대화하는 법은 많은 이들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아무리 성인들과 대화가 물이 흐르듯 스르륵 흘러가는 대화법을 지닌 이라고 할지라도, 10대의 이 한마디면 가히 말이 막히었다고 한다.


“어른들은 몰라요.-_-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