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e&Monster -
나의 귀

a

분류 전체보기 (690)
러브앤피스 (5)
상념 (268)
상상 (40)
일상 (96)
느낌 (211)
읽기 (35)
끄적 (32)
시사 (2)
요리 (1)
낙서 (0)
비밀 (0)
(0)
163,667 Visitors up to today!
Today 377 hit, Yesterday 2,432 hit
Creative Commons License
mi-ring

rss
'읽기'에 해당되는 글 35건
2008/11/08 19:36
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소담출판사


은사자들

 책의 얼굴인, 첫 페이지. 그 속에는 '은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존 사자들과 달리, 색소가 희미한 은사자. 그 '다름' 때문에 사자들 무리에서 따돌림을 받지요. 그래서 은사자들은 그들끼리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에도 등장하는 '은사자 이야기'는 무츠키를 비롯한 '게이'들의 삶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맞아요. 쇼코의 남편인 무츠키는 '게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사귄 '곤'이라는 애인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내'인 쇼코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버럭, 화를 내었을까요? 당장,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윽박질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츠키의 애인인 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종종, '곤 씨랑 고양이가 싸운 이야기'등을 반복해서 들을 정도지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시나요?

사실, 무츠키만큼 쇼코도 '다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알코올과 함께 사는 쇼코. 그동안 수없이 정신과에 다녔었지만, '알코올 중독'이 아니며, '정상적인 범위를 넘지 않는 정신병'이라는 이상한 진단만 받습니다. 이러한 사정이기에 쇼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아내와 호모 남편, 참 내, 그야말로 끼리끼리다."

 기묘한 두 사람. 아니, 무츠키의 애인인 곤까지 합쳐서 세 사람의 이야기는 기묘하고도 기묘합니다. 이들은 조금, 다릅니다. 쇼코까지 포함해서요. 마치, 무리에서 떨어져 사는 은사자들처럼 말이죠. 책의 말미에 무츠키 아버지는 쇼코에게도 '은사자의 모습'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쇼코가 '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무리에서 떨어진 은사자의 모습'에는 일치하지요. 이렇듯, 『반짝반짝 빛나는』은 은사자들의 평범한 일상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단지, 은사자가 아닌 사자들이 볼 때는'기묘'하게 보일 뿐이죠.

사랑이 뭘까?

 저는 이 '은사자들'의 삶을 보면서, 그동안 꼭꼭 눌러두었던 질문이 튀어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로, '사랑'에 대한 질문입니다. 기나긴 세월동안 수많은 이들은 이 질문을 했을 테죠. '사랑이 뭘까?'. 지금쯤은 알 법도 한데, 정말이지, 저는 모르겠어요. 영화 '아는 여자'에서 '동치성'은 말합니다. "난 첫사랑이 없다." 그 동치성의 마음과 비슷하달까요. 지금까지, 누군가를 '사랑했었노라'라고 성급히 말할 수 있는 '믿음'은 없습니다. 다만, 그게 '사랑'이 아니었을까고 되묻는 '행동'만이 남았을 뿐이죠.

 저는 궁금했습니다. 쇼코와 무츠키와의 관계는 사랑일까요 아닐까요. 사회적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겠지요. 무츠키는 쇼코를 한 번도 안지 않았고, 그 흔한 키스조차 안 했을 뿐더러 무엇보다 무츠키는 '게이'이니까요. 처음의 그들은 참, '쿨'합니다. 서로 애인을 자유롭게 갖는 결혼 생활, 무츠키가 밤늦게 들어오지 않아도 기다리지 않는 쇼코, 쇼쿄에게 애인을 권하는 무츠키…. 이러한 삶은 쇼코의 독백에서 잘 드러납니다.

[각주:1]"이런 결혼 생활도 괜찮다, 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 불현듯, 물을 안는다는 시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야기가 흐를수록 '쿨함'은 '애매함'으로 변해갑니다. 어느 날 쇼코는 새벽까지 무츠키를 기다리기도 하고, 쇼코를 생각해서 쇼코의 옛 애인을 만나게 한 '무츠키'를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낍니다. 물론, 무츠키의 '게이'인 모습을 원망하거나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무츠키의 '애인'인 곤도 좋아하고, 무츠키가 '곤'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는 쇼코이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쇼코는 '게이'인 무츠키를 좋아하는 겁니다. '게이'부분을 뺀 무츠키가 아닌, '곤'을 애인으로 둔 '게이 무츠키'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감정을 '쿨함'이라 표현할 순 없을 겁니다. 마침내 쇼코는 이러한 독백을 합니다.

[각주:2]"나는 그저 무츠키와 함께 둘만의 생활을 지키고 싶을 뿐이다. 잃을 것이 하나도 없었어야 할 우리의 결혼 생활. 나는 무츠키를 만나기전까지는 무언가를 지킨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 보지 않았다."

 무츠키와 그 애인인 곤은 어떨까요? 무츠키는 자상합니다. 크리스마스날, 쇼코는 선물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비해, 무츠키는 항상 빼먹지 않습니다. 게다가 항상 쇼코가 좋아하는 것을 선물하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쇼코가 계속 우울함에 빠져 있을 땐, 쇼코의 옛 애인을 만나게 해주기까지 하지요. 물론, 그 때문에 쇼코는 무척 가슴 아퍼하지만…. 무츠키는 쇼코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함께 사는 가족'으로서 쇼코를 좋아합니다.

 곤도 쇼코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곤의 입장에서 쇼코는 '애인의 아내'입니다. 얼마든지 질투를 할 수 있는 위치이지요. 그런데도 쇼코와 곤은 사이가 좋습니다. 그냥, 친절한 사이가 아닌, 함께 있으면 편한 사이랄까요. 쇼코는 무츠키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곤을 불러 셋이 함께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합니다. 쇼코에 있어서 '곤'이 없는 무츠키는 무츠키가 아닙니다. 무츠키를 좋아하는 만큼, 무츠키와 함께하는 곤도 좋아하지요. 이런 쇼코를 곤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이 기묘한 풍경에서 '사랑'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알 듯 모를 듯, 애매한 감정만이 흐릅니다. 어쩌면, 이들의 감정 속에는 '은사자가 아닌 사자'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은사자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쇼코의 독백 속에 그 힌트를 알 수 있습니다.

 [각주:3]"무츠키처럼 선량한 사람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가족으로서의 자상함과 우정, 그저 그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때로 견딜 수없이 괴로워진다. 온몸이 애처로운 과일처럼 되어버린다."

 [각주:4]"무츠키와 잘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태연하고 부드럽고 자상한 무츠키를 견딜 수 없다. 물을 안는 기분이란 섹스가 없는 허전함이 아니라, 그것을 서로에 대한 콤플렉스라 여기고 신경을 쓰는 답답함이다."

 쇼코에게 있어서 무츠키의 '가족으로서의 자상함과 우정'은 자신을 괴롭게 합니다. 그에 대해 두 번째 독백에서 잘 나와있습니다. '섹스가 없는 허전함이 아니라, 그것을 서로에 대한 콤플렉스라 여기고 신경을 쓰는 답답함'으로 구체화된 무츠키의 자상함이 쇼코는 괴롭습니다. 다시 말해,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쇼코는 항상 말합니다. '그냥 이대로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쇼코는 무츠키와 함께 있는 삶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약간의 무리'를 해서라도 부모님을 '거짓'으로 납득시키고 무츠키와 함께 있으려 합니다. 물론, 곤도 함께요.

 이 기묘한 이야기. 사랑인지 아닌지 알쏭달쏭한, 사랑이 무엇인지 질문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마지막은 더욱 기묘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무츠키와 함께 사는 쇼코. 그들이 사는 아파트 바로 아래층에는 무츠키 애인인 곤이 살고 있습니다. 쇼코는 남편 그리고 남편의 애인과 함께 살며, 무츠키는 아내 그리고 애인과 함께 살며, 곤은 애인과 애인의 아내와 함께 살아갑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끝이 나는 지금, 아직도 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다만, 저 기묘한 풍경 속에 '사랑'이 어디엔가 놓여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




어쩌면, 이제는,
사랑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보다
사랑이 어디에 놓여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해야 되는 걸까요?






  1. 『반짝반짝 빛나는』(소담출판사, 56p) [본문으로]
  2. 『반짝반짝 빛나는』(소담출판사, 171p) [본문으로]
  3. 『반짝반짝 빛나는』(소담출판사, 183p) [본문으로]
  4. 『반짝반짝 빛나는』(소담출판사, 183p)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Trackback Address :: http://trueandmonster.tistory.com/trackback/729 관련글 쓰기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2008/10/12 20:24

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창비(창작과비평사)


글쓰기는 생활도구이다!

- 이태준, 『문장강화』


좋은 글쓰기란 무엇인가?


 글을 잘 쓴다는 것, 그것은 좋은 글을 쓴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면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좋은 글’이라 하면,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엄청난 양의 고전이나,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몇몇 글들을 통해 그런 이미지가 생성되었다. 다가가기가 어렵고, 자신과는 매우 동 떨어진 그런 글이 좋은 글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허(尙虛) 이태준 선생이 쓴 『문장강화』에서 좋은 글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글이라 하면 시나 소설 등의 문학 혹은 유명인사의 수필만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사실 글에는 일기도 있고 서간문(편지)도 있다. 그런 글에 ‘대단함’ 혹은 ‘다가가기 어려움’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문장강화』에 일기나 서간문의 형식에서 좋은 글의 예시를 보면,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이들이 쓴 글이다. 다시 말해, 좋은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의미이다.


 좋은 글을 누구나 쓸 수 있다면, 좋은 글이라 부를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상허(尙虛) 이태준 선생에게 있어 좋은 글의 기준은 정해진 게 아니라, 글을 쓰는 ‘목적’에 따라 수 없이 다양한 것이다. 글을 쓸 데에는 그 목적이 각각 다를진대(서간문과 기사문의 목적이 같을리 없다.), 그 목적에 알맞은 ‘도구’의 역할을 하는 글을 좋은 글이라 보았다. 그렇기에 도구의 쓰임에 ‘위계’가 없듯이, 글쓰기에도 ‘위계’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글쓰기’라는 도구를 잘 쓰느냐에 따라 좋은 글이 갈린다고 보았다. 사실, 도구를 잘 쓰는 것은 기술자이지 귀족이 아니잖은가.


글쓰기는 생활도구이며,

글을 잘 쓰는 것은 기술이다.


 결국 『문장강화』에서 글쓰기란 철저하게 생활도구로 인식된다. 그리고 좋은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생활 도구를 잘 다루고 쓸 수 있음을 의미한다. 도구를 잘 다루고 쓴다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해 ‘기술’이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은 ‘기술’의 습득이라는 게 상허(尙虛) 이태준 선생의 주요한 생각이다. 그의 문장작법(文章作法)에 대한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내 있는 구절이 있다. 바로 아래의 글이다.


 〈그러니까 글은 아무리 소품이든, 대작이든, 마치 개미면 개미, 호랑이면 호랑이처럼, 머리가 있고 몸이 있고 꼬리가 있는, 일종의 생명체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한 구절,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인, 생명체적인 글에서는, 전체적이요 생명체적인 것이 되기 위해 말에서보다 더 설계하고 더 선택하고 더 조직․개발․통제하는 공부와 기술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필요한 공부와 기술을 곧 ‘문장작법(文章作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문장강화』22p.


 위 글에서 ‘설계’, ‘선택’, ‘조직’, ‘개발’, ‘통제’의 어휘는 글쓰기의 기술적 성격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것 뿐만이 아니더라도 『문장강화』에서는 글의 곳곳에서 글쓰기에 대한 기술적인 생각을 드러내는 구절들이 많다. 〈언어는 철두철미 생활용품이다.>[각주:1], 〈말도 역시 신이 아닌 사람이 만든 한낱 생활도구다. 완미전능(完美全能)한 신품(神品)이 아니다.>[각주:2],〈훌륭한 문장가란 모두 말의 채집자, 말의 개조․제조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각주:3] 등의 구절에서 그 생각을 쉬이 유추할 수 있다.


 그렇기에 상허(尙虛) 이태준 선생에 있어서 글쓰기 기술은 ‘뽐냄’이 아니라 ‘도구적 목적 실현’에 있다. 생활 도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목적이다. 예쁜 도구보다 쓰기 용이한 도구가 더 좋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을 두고 있기에, 그는 『심청전』,『장화홍련전』등의 글을 좋은 글이라 보지 않는다. 이야기를 전달하려기 보단, ‘유려한 수사법’에 가까운 글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조차, 책이 드물어서 낭독을 통한 책 읽기의 사회 풍토의 ‘목적’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그는 설명한다. 이러한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낸 부분이 운문과 산문을 설명할 때이다. 〈‘산문이란 오직 뜻에 충실한다’는 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어느 틈엔지 음조에 관심이 가고 만다.>[각주:4] 이처럼, 글이라는 생활도구에는 종류에 따라 그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충실하게 써야한다는 게, 『문장강화』의 글쓰기 지론이다.


글쓰기 사용설명서,

『문장강화』


 『문장강화』도 산문으로 쓰인 글이다. 다시 말해, 그 ‘뜻’이 있다는 말이다. 그 뜻은 쉽게 말하면 ‘글쓰기 사용설명서’라고 할 수 있겠다. 주위 환경에 의해서 저절로 배우게 되는 ‘말’과 달리 ‘글’은 배워야 쓸 수 있는 ‘도구’라는 게 상허(尙虛) 이태준 선생의 생각이므로 『문장강화』는 대단히 친절한 글쓰기 사용설명서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생활 도구(가전제품 등의….)의 사용설명서에는 그림이나 사진이 있다. 보다 쉽게 글을 이해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마찬가지로, 『문장강화』에는 예문이 엄청나게 많다. 책의 절반이 예문으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예문을 통해, 상허(尙虛) 이태준 선생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또한 『문장강화』는 글 자체가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글쓰기 사용설명서’인 만큼, ‘사용설명’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지, 사용설명‘글’을 읽는 데 중점을 두지 않는 다는 말이다. 그래서 『문장강화』의 글은 화려하지도 않고, 웅장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글의 목적’에 맞게 쓰인 것이다. 마치, 장자에서 나오는 “득어망전得魚忘筌”(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린다.)의 글쓰기의 예를 보여주는 것 같다. 사용설명서의 ‘글’은 잊어버리되, ‘어떻게 사용하는 지’는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문장강화』는 양반보다는 선비 혹은 평민의 모습에 가깝다. 글에는 왠지 대단한 비밀이 담겨있을 듯 말하며, 글쓰기를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 글이 아니다. 글쓰기는 누구든지 어디서나 쓸 수 있는 ‘생활 도구’이고, 그 ‘생활 도구’를 잘 쓰는 법을 알려주는 ‘생활적인 글’이다.


 그동안 ‘글쓰기’의 목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어떤 글보다도 생활 속의 글이기에 『문장강화』도 60여 년이 지난(1947년 출판) 지금도 충분히 유의미하다고 본다. 글에 대한 환상과 착각이 생겨난다면, 『문장강화』를 읽음으로써 글쓰기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1. 이태준, 『문장강화』33p [본문으로]
  2. 위 책, 37p [본문으로]
  3. 위 책, 38p [본문으로]
  4. 위 책, 104p [본문으로]
Trackback Address :: http://trueandmonster.tistory.com/trackback/688 관련글 쓰기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2008/08/20 18:04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 - 6점
스터즈 터클 지음, 이정득 옮김/이매진


진한 삶의 내음이 풍기는 책,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

 진한 삶의 내음을 맡아본 적이 있는가?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고, 꽉 채워져 있으면서도 텅 비워버린 삶을 떠오르게 하는 내음…. 나는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를 읽으며 그 지독한 내음이 느껴졌다. 아찔하며 황홀한 그 무엇….

 재즈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마치, 흔해빠진 눈물의 사연을 생각하게 한다. 따스한 빛이 비치지 않는 세상의 그늘, 그윽한 담배연기와 씁쓸한 술의 내음이 가득한 술집. 재즈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마치, 소외받는 자들의 왕이자 친구인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처럼….

 예술은 삶 없이는 태어날 수 없다. 재즈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말의 의미는 재즈가 태어났던 곳은 곧, 연주자들의 삶이었다는 사실을 담아낸다. 따뜻한 양지의 반쪽, 그들은 술집과 그 속에 담긴 지치고 져버린 쓴맛에 익숙했다. 흥이 나는 재즈이든, 조용히 마음을 훑어가는 재즈이든 그 속에는 쓴맛이 담겨 있었다.

 끈적거리는 삶의 애환. 이런 게 정말, 재즈이자 삶이라는 걸 스터즈 터클은 보여준다. 그 누구보다 재즈처럼 살아갔던 13명의 연주자의 삶을 통해서…. 당신이 재즈를 알든지 모르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재즈가 담았던 삶의 그 무엇을 느낄 수가 있다면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에서 삶, 그 자체인 재즈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Trackback Address :: http://trueandmonster.tistory.com/trackback/608 관련글 쓰기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2008/08/16 15:59
네 멋대로 써라 - 10점
데릭 젠슨 지음, 김정훈 옮김/삼인


책 한 권에 나의 마음을 빼앗기다. +_+

 지금껏 읽었던 책 중에서 너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것이 한 권이라도 있었니? 나는 있었어. 바로, 데릭 젠슨이 쓴『네 멋대로 써라』이지. 내가 이 책과 '처음' 만났을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어. 하루하루를 잘난 대학교를 위해 고귀한(그러나 속은 탐욕으로 가득한) 희생을 하라고 외치는 시스템에 넌덜머리가 난 고등학생 말이야. 스스로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는 배움에서 탈출해서 내가 원하는 독서를 통해, 잠시나마 괴로움을 잊어가면서 성장할 때였지. 그러한 독서 중에서 만난 책이 『네 멋대로 써라』였어.

 내가 학생일 때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듯 이놈의 잘난 교육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부정하며, 괴롭히지. 나도 그랬어. 끊임없이 나를 부정 당하는 곳에서(혹은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되는 것을 긍정하는 곳에서) 정말 미칠 것만 같았어. 그런데 그렇게 조금씩 파괴되어가는 나의 마음을 한순간에 두근거리게 바꿔버린 거야. 고작, 글쓰기 책 한 권이 말이야. 그리고 난 그 두근거림을 믿고 지금, 여기까지 왔어. 어쩌면, 나의 미래가 바뀌어버린 건지도 모르겠어.

삶은 글쓰기의 바탕이고 글쓰기는 삶의 바탕.
고로, 글쓰기 책은 삶에 관한 책.

 어떤 책이기에, 미래까지 바꾸게 하였다고 하는 것인지 궁금하지? 요즘에 흔하고 흔한 어떻게 하면 '논술 시험'에서 점수를 높게 만들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력서를 폼나게 쓸 수 있는지에 관한 책이었다면 절대 나에게 두근거림을 줄 수 없었겠지. 이 책에서 글쓰기는 삶이고, 삶은 글쓰기다. 라는 말이 있어. 다시 말해서, 이 책은 글쓰기를 매개로 해서 우리의 삶과 배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거야.

 우리의 끔찍한 문화 속에서 배움은 사람이라는 기계의 프로그램 주입이 되었고, 그 속에서 글쓰기 교육은 정말 따분한 수업에 불과해졌지. 그런데 데릭 젠슨은 자신이 대학교에서 혹은 교도소에서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완전히 다른 방식의 글쓰기 교육을 하게 되지. 1학기 정도의 글쓰기 수업(그리고 삶 수업)에 대해서 주제별로 써놓은 책이 『네 멋대로 써라』의 구성이지. 물론, 지겨운 수업 내용 보고서와는 차원이 달라.

 글이 섹스보다 재밌어야 한다느니, 가장 중요한 글쓰기 연습은 기성세대와 구조에 Fuck 을 날리는 것이라느니 하며 유쾌한 글쓰기 수업을 하지. 그리고 정말 자신이 누군지 알아야 하고,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되며 그것은 오로지 스스로만이 알고 할 수 있는 거라 말해. 그리고 글쓰기와 삶 교육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멋진 삶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하지. 그의 글과 수업 내용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두근거림이,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이,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솟아오르지. 한마디로, 짜릿해! >_<

지긋지긋한 이 문화에 지쳐버린 당신을 위한 책

 세상을 살아가면서 도저히 이 문명과 문화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그 속에서 오로지 자신이 바꾸는 것이, 적응하는 것이 올바른 답인 양 강요하고 있을 때, 그래서 정녕 자신이 미친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할 때 『네 멋대로 써라』를 읽어봐. 이 책은 너에게 한마디 하겠지. "여러분들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이 문화가 미친 거에요." 그 무엇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이 되고 그것이 진정 좋은 것임을 유쾌한 문장으로 너에게 알려줄 거야.

 그뿐만이 아니지. 처음 이 책과 만날 때는 '삶'에 대한 이야기에 매료되어서 다른 부분을 미처 살피지 못했지만, 이제는 보이더군. '글쓰기' 부분이 말이야. 삶과 글쓰기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듯이 이 책은 진정한 글쓰기에 대해서 안내를 하고 있어. 단순히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글쓰기가 아닌 우리의 삶을 위한 글쓰기를 말이야.
Trackback Address :: http://trueandmonster.tistory.com/trackback/602 관련글 쓰기
BlogIcon 루인 | 2008/08/16 17:43 | PERMALINK | EDIT/DEL | REPLY
꺅. 이 책 너무 좋아요. >_<
전 정+희+진쌤이 사석에서 이 책을 얘기해서 읽었어요.
읽고 어찌나 재밌고 기쁘던지요. 흐흐
BlogIcon 여울바람 | 2008/08/16 18:06 | PERMALINK | EDIT/DEL
정말, 짜릿해요.+_+ㅋㅋ
BlogIcon 아르헨티나백브레이커 | 2008/08/16 21:01 | PERMALINK | EDIT/DEL | REPLY
빌려주면 안될까??????
BlogIcon 여울바람 | 2008/08/16 23:52 | PERMALINK | EDIT/DEL
1주일 이내로 독파 가능?ㅋ
BlogIcon 아르헨티나백브레이커 | 2008/08/18 03:58 | PERMALINK | EDIT/DEL | REPLY
가능합니다....

아 그리고 블로그 과외좀 부탁해
더미 | 2008/09/23 16:40 | PERMALINK | EDIT/DEL | REPLY
결국 내 독해력이 부족한건가? 흥미롭긴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지루하다..
BlogIcon 여울바람 | 2008/09/23 19:46 | PERMALINK | EDIT/DEL
글쓰기에서 보는 게 아니라, 사회를 보는 시각에서 공감을 느낀다면 무척 재미있지만, 공감을 느끼지 못하면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지루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혹시 저를 아는 지인?)
더미 | 2008/09/24 11:13 | PERMALINK | EDIT/DEL | REPLY
사회를 보는 시각에서 공감을 느끼고 글쓴이가 말하려는 내용도 이해가 가지만
잡담, 혹은 정말 필요치 않은 쓸데없는 수다가 대부분인 듯.
정말 이건 글쓰기에 대한 잡담에 불과해 보인다.
진짜.. a4 한장에 쓸 내용을 이렇게 지루하게 늘어지는 글을 쓴 저자도 혹은 번역자도 정말 최악이다..
물론 내 주관적인 관점에서 말이다.. (지인은 아닐꺼에요;;)
BlogIcon 여울바람 | 2008/09/24 18:51 | PERMALINK | EDIT/DEL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저도 처음에는 뭐 이런 글이 있나?-_-; 싶었죠.ㅋ 주절주절 수다 속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끌어내는게 데릭 젠슨의 글쓰기 법이라 생각됩니다. 데릭젠슨의 두꺼운 책 '거짓된 진실' 또한 내용은 다르지만, 글쓰는 형식은 비슷해요.ㅋ 번역자체의 문제보다는 원글의 형식이 워낙 특이한 것도 한 몫 했겠죠.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2008/07/31 21:40
아이, 로봇 - 6점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우리교육


신화 속에 있는 '지금 여기의 우리'

 신화를 읽어보적 있어? 요즘 사람들은 다 아는 그리스 로마 신화 부터, 북유럽 신화 그리고 한국의 많은 신화까지…. 신화는 보통 지금과는 멀리 떨어진 과거에 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완전 '안드로메다 성운'의 이야기라는 거지. 그런데도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듣거나 읽고 있어.

 왜 그럴까? 그건, 신화 속에 '지금 여기의 우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신화 속에 나오는 수 많은 신과 거인 그리고 요정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야. 이것은 마치, 유행가 속에서 우리 사연을 상상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창조자 인간, 창조물 로봇
그들의 새로운 신화

 뜸금없이 웬 신화 이야기냐고? 그건, 내가 『아이, 로봇』을 읽으면서 '새로운 신화'를 읽는 기분이였기 때문이야. 『아이, 로봇』은 그저 미래에 로봇을 등장시킨 평범한 소설이 아니였어. 각각의 로봇에 대한 '에피소드'형식이 엮어진 책은 마치 예전에 내가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 라던지 북유럽 신화를 떠올리게 했지. 차이가 있다면 창조자가 인간이고 창조물이 로봇이라는 차이 일뿐이야.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을 단순히 '기계'를 넘어서서 '창조물'로 봤어. 우리가 숱한 신화에서 등장한 '인간'처럼 말이야.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지만, 인간이 그저 '만들어진 인형'이 아니었듯 『아이, 로봇』에 나오는 로봇들은 하나같이 '인형'이 아닌 '톡톡 튀는 창조물'로서 존재하고 있어. 신을 우습게 보는 인간처럼 인간을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기도 하고, 신을 속이는 인간처럼 인간을 속이는 로봇도 있지. 인간에게서만 보았던 모습을 우리가 만든 '로봇'에서 보고, 그 모습에 신이 인간에게 당황했던 것처럼 인간이 로봇에 애를 먹는 모습은 흥미롭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해.


로봇을 위한? 인간을 위한!
미래의 신화 『아이, 로봇』

 그러한 모습을 계속 읽고 있노라니, 마치 로봇의 신화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어. 먼훗날, 『아이, 로봇』을 읽고 로봇이 자신의 머나먼 과거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까? -.-? 뭐, 그건 로봇에게 맡기고 나는 '인간'으로써 이야기 해보겠어. 내가 아까 위에서 마치 로봇이 신화 속 '인간'의 역활을 한다고 했지? 그렇다는 말은 로봇 이야기 속에서 결국,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볼 수 있다는 거지.

 그 뿐만이 아니야. 『아이, 로봇』속에서 로봇을 우리의 한 단면으로 본다면 그것을 상대하는 '인간' 또한 우리의 한 단면이지. 결국, 소설을 읽으면서 각각 다른 쌍방의 우리를 마주보게 되. 그것은 '신과 인간'의 신화보다도 직접적으로 '인간'에 대해서 돌아보게 만든다는 거야. 즉, 정말 '재미'있으면서 매우 '뜨끔'한 이야기라는 거지. 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인간들의 세상인 '지금 여기'에서도 누군가는 '창조자'의 위치에 있고, 누군가는 '창조물'의 위치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