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에 해당되는 글 2건
2008/05/08 23:53
[끄적]
2008년, N[앤] 2호가 찾아오다!
왔어요- 왔어요- 무려, 6개월의 기다림 속에 드디어 왔어요!! 에? 무엇이 왔냐고? 바로, ‘여성주의 저널 N[앤] 제 2호’가 말이야! 2007년 당당하게 낸 ‘창간준비호’와 그 후, 더욱 멋지고 아름답게 낸 ‘창간호’에 이어, 2008년에도 어김없이 N[앤]이 찾아왔어!+_+ 게다가, 내가 이 ‘뜨끈뜨끈’한 제 2호에 비평 글을 싣게 되었지.(엄니! 나 N[앤]에 나왔어요!) 근데, ‘비평’이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이기보다는 그저 내 생각을 담은 길-다란 ‘댓글’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주길 바라.^^;
‘여성주의 저널 N[앤]’의 이름 속에 들어있는 ‘여성주의’. 그것은 ‘세상을 보다 솔직하게, 행복하게 보는 다양한 시선’에 대한 이야기야. 개성이라느니, 창의성이라느니 라는 이야기가 나온 지도 꽤 오래되었어. 그런데도 사람들의 생각의 색은 한정되고 삶의 태도는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지. 그렇기에 여성주의 저널 N[앤]은 우리가 보지 않는 아름다운 색을 보여주고, 딱딱하게 굳은 생각은 근육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야기를 꺼내지. 아! 여기서 ‘여성주의’라면 썩소를 날리는 이들(여성주의라고 하면 한 가지 이상의 생각을 하지 못하는 불쌍한 이들. -_ㅠ)에게 한마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여성주의는 다양하거든요? :p" 자, 우리가 외면했던 ‘매혹적인 색’의 이야기를 한 번 들여다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감수성
우리가 초․중․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와 사회에서까지 지겹도록 듣는 이야기가 있지. “이것 아니면 저것이 전부이니라.” 백이 아니면 흑이며, 정답이 아니면 오답이고,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이야기 말이야. 그런데 정말 그럴까? 세상은 딱 잘라 ‘이것’과 ‘저것’으로 나눠질 수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해 N[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언가’, 그리고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에 대해 이야기 해.
N[앤] 2호의 처음을 장식하는 마녀 씨의 ‘데이트 성폭력’에 관한 글을 살펴보자. 우리는 쉽게 ‘성폭력’을 하는 유명 인사들을 욕하면서 무엇이 ‘성폭력’이고 무엇이 ‘성폭력이 아닌 것’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실제로, 마녀 씨의 글의 처음에 나오는 사례들을 보면서 우리는 판단할 수 있어. 그런데 점점 나중에 나오는 사례들을 보면 우리는 혼란스러워지지.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었는데, 나중에 그것이 ‘폭력적’으로 느껴졌을 땐 어떡하지? 단순히 ‘강제적 동의’라는 맥락에 넣기에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간단하지 않다고 마녀 씨는 이야기 해. 간단히 상대방 혹은 내가 나쁘다고 판단하기보다는 ‘서로의 몸에 관함 감수성’의 문제 아닐까? 라고 제시하면서, 이러한 ‘감수성’을 키워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지.
영롱 씨의 ‘나는 왜 레즈비언이 아닌가?’의 글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어. ‘이것’ 아니면 ‘저것’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이성애’와 ‘동성애’의 딱 부러진 ‘경험’밖에 없는 것일까? 그 당연한 ‘믿음’ 대해 ‘질문’을 던지지. 바로, 이렇게.
“우리들 중 다수는 어쩌면 100% 순수한 이성애자, 순수한 동성애자보다는 오히려 경계에 더욱 인접해있는 존재들인 게 아닐까? (…) 그것은 내가 가진 ‘레즈비언적’ 경험인 것이다. 그러니 이 단어는 고정되거나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계속되는 고민과 사고 속에서, 그 경험에 대한 해석/재해석 과정을 통해 변형되고 교제될 수 있는 유동적인 개념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서 ‘확실한 이성애자’ 혹은 ‘확실한 동성애자’라는 말은 어쩌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0% 순수한 남성 혹은 100% 순수한 여성. 그런 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구가 아닐까 하는 물음처럼 말이다. 그런 제 3의 가능성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이분법적인 젠더처럼, 성적 정체성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솔직하지’ 않은 게 아닐까? 어떻게 생각해? 또한 내가 이번 N[앤] 2호 중에서 흥미롭게 읽었던 글 중 하나인 날래 씨의 ‘다자 사랑’을 살펴보자. ‘사랑이야? 우정이야?’ 이라는 질문을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는 ‘친구’와 ‘애인’으로 딱 잘라 나눠지지. 그 속에서 사랑이라는 이것, 우정이라는 저것이라는 관계 밖에 구성하지 못하고, 그 속에서 관계의 위계화가 이루어져. (대개는 우정보단 사랑이지.) 그런데 이게 정말 우리의 마음일까? 날래 씨가 말한 것처럼 ‘사랑했던 3명의 애인도 각각 관계가 다르고, 친했던 3명의 친구도 각각 관계가 달라’. ‘다자 사랑’을 살펴보면서 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의 맥락에 포함되지 않았던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살펴본 거지. 그 중 아래의 문구가 인상 깊었어.
“나는 그를 만났을 뿐, 그녀의 남자친구를 만난 것이 아니었고, 그녀를 만날 때에도 그의 여자친구로 만난 것이 아니라 그녀를 만난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같지 않다. 그가 그녀의 애인이건 누구의 무엇이건 그와 나 사이의 관계는 우리들의 소통 속에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와 그녀의 관계에 의해 제약받아야할 이유는 없다.”
“모든 사람이 자기 나름의 특별함을 가지고 있고,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관계만이 갖는 친밀성이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모든 관계에 대해 그 특성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전용 그릇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이를 차별로 학습하는 아이들’이라는 글을 보면, ‘남성적인 남성’, ‘여성적인 여성’이라는 틀을 고착화시키는 또 하나의 ‘이것 아니면 저것’의 논리를 볼 수 있어. 게다가 ‘여성적인 남성’, ‘남성적인 여성’으로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 그것 역시 ‘이것 아니면 저것’의 논리와 다를 게 없다는 거야.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그것의 감수성’ 키워야 되지 않느냐고 묻고 있어. 이렇듯 우리가 흔히 아는 ‘흑백’만이 ‘보다 다를 수 있는 색’을 느끼고 바라보고 인정해야 한다고 N[앤]은 말하고 있어.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우리는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 특히, N[앤]은 여성주의 창을 통해, 기존의 것을 색다르게 생각해봐. 지금부터 말 하려는 3개의 글은 ‘또 다른 시선’에 대한 이야기야. 먼저, 렐라 씨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 대한 글을 보면, 그저 ‘공포 영화’일 수 있었던 영화에 대해 그 속에 담겼다고 여겨지는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바라보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사실은 나는 영화를 보지 않아서 잘 몰랐지만, ‘무심코’ 봤으면 몰랐었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
또 소현 씨의 ‘내 몸을 사랑하고 싶어라’를 보면, 우리가 ‘몸’을 바라보는 시선을 다시 돌아보게 해. 몸 중에서도 특히, 2곳을 말하면서 조근 조근 이야기 하는데, 하나는 겨드랑이 털이고 둘은 젖꼭지에 대한 이야기야. 보통, 남성들은 겨드랑이 털을 보이고, 상의에 면티 한 장 걸치면서 젖꼭지를 보임에도 여성에게는 그게 허락되지 않지. 마치, 여성에게는 겨드랑이 털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고, 젖꼭지는 보이면 민망한 것이라는 것처럼. 그에 대해서 소현 씨는 이렇게 말 해.
“내 브래지어가 흰 티셔츠에 비치는 걸 너무나 철두철미하게 민망해하지 않고, 짧은 치마를 입으면 팬티가 보일 수도 있고, 유두가 적나라하게 비치지 않은 노브라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평등의 밸런스를 맞추고 싶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저씨들의 유두와 나의 유두가 불평등하기 때문에. 그리고 아무리 섹스 어필시대이지만 남자의 팬티와 여자의 팬티가 대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정된 모습의 저항이 아니라 말하기 애매하지만 ‘불평등’이라는 창백한 삶 속에 ‘던져진’ 존재로서 나를 이해하고 그리고 그 속에 나와 관계 맺는 것들을 이해하면서 나의 삶과 세상을 동시에 변화시키고자 움직이는...말은 거창하지만 거창하지 않은 작은 저항들 말이다.”
위 글은 우리가 어느새 익숙해진 ‘몸’에 대한 억압과 부정에 대해 생각하게 해. 우리는 우리의 몸을 보다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날래 씨의 『88만원 세대』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의 비평 글이 있어. 기존 ‘결혼’ 관념과는 맞지 않는 20대에 대한 이야기, ‘88만원’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책에서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시선을 두고 이야기를 해. 그런 이야기를 통해, 보다 넓게 책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지.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 그런데 현실에서는 똑같은 것을 보면 똑같은 생각만을 하게 되는 우리를 볼 수 있어. 그에 대해 N[앤]은 다른 생각을 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봐. 어쩌면 ‘모두가 똑같은 생각’은 우리의 ‘진짜 생각’이 아닐지도 몰라. 물론, 여기에 나왔던 ‘또 다른 시선’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야. 단순히,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런 생각, 특히 ‘여성주의’를 통해 보는 시선이 있을 수 있고 그 시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거지.
행복한 경험, 여성주의!
여성주의, 그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보다 행복하기’ 위한 시선이라고 할 수 있어. 신식 씨의 ‘장 보러 가는 날’을 보면, 장을 본다는 행위를 통해, ‘다른 누군가가 되어본다는 것’은 무척이나 좋은 경험일 수 있지. 단순히 ‘장을 보는 여성뿐만 아니라, 장을 보는 자취생 혹은 홀아버지’의 역할까지 ‘되어보는 것’이 아닐까? 그 속에서 ‘장을 보는 사람’에 대해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또한 꿈의 택배 씨의 ‘밥상 위에 평화가’라는 글을 보면 요리를 하는 것, 그리고 밥을 함께 먹는 다는 것의 평화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여기서는 밥과 요리가 단순히 생존을 위한 ‘밥’이 아니고, 너무나도 고단한 ‘가사 노동’의 일부인 요리가 아닌, 함께하는 ‘밥’이고 즐거운 요리인 거야. 그리고 그 속에 담긴 평화를 바라보면서 행복할 수 있는 거지. 이렇게 여성주의로 보는 시선은 ‘불편한 세상’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행복하게 도와주기도 해. 그렇기에 이렇게 N[앤]이라는 저널을 내면서 ‘여성주의’를 사람들과 나누려는 하는게 아닐까?
딱 부러지는 정답보단,
유쾌한 질문을 날리는 N[앤]이 되기를!
세상에는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참 많아. “내가 말하는 이게 정답이요!”라면서 자신을 따르라는 수많은 사람들. 그런데 그 속에서는 우리가 진정 원하는 ‘정답’이 없다고 느껴.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많은 정답보다는 유쾌한 질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질문’을 날리는 역할이 바로 N[앤]이라고 생각해. 그러한 점에서 이번 N[앤] 2호에 담긴 질문들은 정말 매력적이었어. 여성주의라면 ‘이럴 거야’ 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다양한 ‘여성주의’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기존의 시선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또 다른 매력적인 시선’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N[앤]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상, 나의 길-다란 댓글을 마치겠어. :)
왔어요- 왔어요- 무려, 6개월의 기다림 속에 드디어 왔어요!! 에? 무엇이 왔냐고? 바로, ‘여성주의 저널 N[앤] 제 2호’가 말이야! 2007년 당당하게 낸 ‘창간준비호’와 그 후, 더욱 멋지고 아름답게 낸 ‘창간호’에 이어, 2008년에도 어김없이 N[앤]이 찾아왔어!+_+ 게다가, 내가 이 ‘뜨끈뜨끈’한 제 2호에 비평 글을 싣게 되었지.(엄니! 나 N[앤]에 나왔어요!) 근데, ‘비평’이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이기보다는 그저 내 생각을 담은 길-다란 ‘댓글’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주길 바라.^^;
‘여성주의 저널 N[앤]’의 이름 속에 들어있는 ‘여성주의’. 그것은 ‘세상을 보다 솔직하게, 행복하게 보는 다양한 시선’에 대한 이야기야. 개성이라느니, 창의성이라느니 라는 이야기가 나온 지도 꽤 오래되었어. 그런데도 사람들의 생각의 색은 한정되고 삶의 태도는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지. 그렇기에 여성주의 저널 N[앤]은 우리가 보지 않는 아름다운 색을 보여주고, 딱딱하게 굳은 생각은 근육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야기를 꺼내지. 아! 여기서 ‘여성주의’라면 썩소를 날리는 이들(여성주의라고 하면 한 가지 이상의 생각을 하지 못하는 불쌍한 이들. -_ㅠ)에게 한마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여성주의는 다양하거든요? :p" 자, 우리가 외면했던 ‘매혹적인 색’의 이야기를 한 번 들여다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감수성
우리가 초․중․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와 사회에서까지 지겹도록 듣는 이야기가 있지. “이것 아니면 저것이 전부이니라.” 백이 아니면 흑이며, 정답이 아니면 오답이고,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이야기 말이야. 그런데 정말 그럴까? 세상은 딱 잘라 ‘이것’과 ‘저것’으로 나눠질 수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해 N[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언가’, 그리고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에 대해 이야기 해.
N[앤] 2호의 처음을 장식하는 마녀 씨의 ‘데이트 성폭력’에 관한 글을 살펴보자. 우리는 쉽게 ‘성폭력’을 하는 유명 인사들을 욕하면서 무엇이 ‘성폭력’이고 무엇이 ‘성폭력이 아닌 것’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실제로, 마녀 씨의 글의 처음에 나오는 사례들을 보면서 우리는 판단할 수 있어. 그런데 점점 나중에 나오는 사례들을 보면 우리는 혼란스러워지지.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었는데, 나중에 그것이 ‘폭력적’으로 느껴졌을 땐 어떡하지? 단순히 ‘강제적 동의’라는 맥락에 넣기에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간단하지 않다고 마녀 씨는 이야기 해. 간단히 상대방 혹은 내가 나쁘다고 판단하기보다는 ‘서로의 몸에 관함 감수성’의 문제 아닐까? 라고 제시하면서, 이러한 ‘감수성’을 키워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지.
영롱 씨의 ‘나는 왜 레즈비언이 아닌가?’의 글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어. ‘이것’ 아니면 ‘저것’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이성애’와 ‘동성애’의 딱 부러진 ‘경험’밖에 없는 것일까? 그 당연한 ‘믿음’ 대해 ‘질문’을 던지지. 바로, 이렇게.
“우리들 중 다수는 어쩌면 100% 순수한 이성애자, 순수한 동성애자보다는 오히려 경계에 더욱 인접해있는 존재들인 게 아닐까? (…) 그것은 내가 가진 ‘레즈비언적’ 경험인 것이다. 그러니 이 단어는 고정되거나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계속되는 고민과 사고 속에서, 그 경험에 대한 해석/재해석 과정을 통해 변형되고 교제될 수 있는 유동적인 개념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서 ‘확실한 이성애자’ 혹은 ‘확실한 동성애자’라는 말은 어쩌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0% 순수한 남성 혹은 100% 순수한 여성. 그런 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구가 아닐까 하는 물음처럼 말이다. 그런 제 3의 가능성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이분법적인 젠더처럼, 성적 정체성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솔직하지’ 않은 게 아닐까? 어떻게 생각해? 또한 내가 이번 N[앤] 2호 중에서 흥미롭게 읽었던 글 중 하나인 날래 씨의 ‘다자 사랑’을 살펴보자. ‘사랑이야? 우정이야?’ 이라는 질문을 흔히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관계는 ‘친구’와 ‘애인’으로 딱 잘라 나눠지지. 그 속에서 사랑이라는 이것, 우정이라는 저것이라는 관계 밖에 구성하지 못하고, 그 속에서 관계의 위계화가 이루어져. (대개는 우정보단 사랑이지.) 그런데 이게 정말 우리의 마음일까? 날래 씨가 말한 것처럼 ‘사랑했던 3명의 애인도 각각 관계가 다르고, 친했던 3명의 친구도 각각 관계가 달라’. ‘다자 사랑’을 살펴보면서 실은 ‘이것’ 아니면 ‘저것’의 맥락에 포함되지 않았던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살펴본 거지. 그 중 아래의 문구가 인상 깊었어.
“나는 그를 만났을 뿐, 그녀의 남자친구를 만난 것이 아니었고, 그녀를 만날 때에도 그의 여자친구로 만난 것이 아니라 그녀를 만난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같지 않다. 그가 그녀의 애인이건 누구의 무엇이건 그와 나 사이의 관계는 우리들의 소통 속에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와 그녀의 관계에 의해 제약받아야할 이유는 없다.”
“모든 사람이 자기 나름의 특별함을 가지고 있고,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관계만이 갖는 친밀성이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모든 관계에 대해 그 특성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전용 그릇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차이를 차별로 학습하는 아이들’이라는 글을 보면, ‘남성적인 남성’, ‘여성적인 여성’이라는 틀을 고착화시키는 또 하나의 ‘이것 아니면 저것’의 논리를 볼 수 있어. 게다가 ‘여성적인 남성’, ‘남성적인 여성’으로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 그것 역시 ‘이것 아니면 저것’의 논리와 다를 게 없다는 거야.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그것의 감수성’ 키워야 되지 않느냐고 묻고 있어. 이렇듯 우리가 흔히 아는 ‘흑백’만이 ‘보다 다를 수 있는 색’을 느끼고 바라보고 인정해야 한다고 N[앤]은 말하고 있어.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우리는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 특히, N[앤]은 여성주의 창을 통해, 기존의 것을 색다르게 생각해봐. 지금부터 말 하려는 3개의 글은 ‘또 다른 시선’에 대한 이야기야. 먼저, 렐라 씨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 대한 글을 보면, 그저 ‘공포 영화’일 수 있었던 영화에 대해 그 속에 담겼다고 여겨지는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바라보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사실은 나는 영화를 보지 않아서 잘 몰랐지만, ‘무심코’ 봤으면 몰랐었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
또 소현 씨의 ‘내 몸을 사랑하고 싶어라’를 보면, 우리가 ‘몸’을 바라보는 시선을 다시 돌아보게 해. 몸 중에서도 특히, 2곳을 말하면서 조근 조근 이야기 하는데, 하나는 겨드랑이 털이고 둘은 젖꼭지에 대한 이야기야. 보통, 남성들은 겨드랑이 털을 보이고, 상의에 면티 한 장 걸치면서 젖꼭지를 보임에도 여성에게는 그게 허락되지 않지. 마치, 여성에게는 겨드랑이 털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고, 젖꼭지는 보이면 민망한 것이라는 것처럼. 그에 대해서 소현 씨는 이렇게 말 해.
“내 브래지어가 흰 티셔츠에 비치는 걸 너무나 철두철미하게 민망해하지 않고, 짧은 치마를 입으면 팬티가 보일 수도 있고, 유두가 적나라하게 비치지 않은 노브라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평등의 밸런스를 맞추고 싶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저씨들의 유두와 나의 유두가 불평등하기 때문에. 그리고 아무리 섹스 어필시대이지만 남자의 팬티와 여자의 팬티가 대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정된 모습의 저항이 아니라 말하기 애매하지만 ‘불평등’이라는 창백한 삶 속에 ‘던져진’ 존재로서 나를 이해하고 그리고 그 속에 나와 관계 맺는 것들을 이해하면서 나의 삶과 세상을 동시에 변화시키고자 움직이는...말은 거창하지만 거창하지 않은 작은 저항들 말이다.”
위 글은 우리가 어느새 익숙해진 ‘몸’에 대한 억압과 부정에 대해 생각하게 해. 우리는 우리의 몸을 보다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날래 씨의 『88만원 세대』에 대한 ‘또 다른 시선’의 비평 글이 있어. 기존 ‘결혼’ 관념과는 맞지 않는 20대에 대한 이야기, ‘88만원’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책에서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시선을 두고 이야기를 해. 그런 이야기를 통해, 보다 넓게 책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지.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어. 그런데 현실에서는 똑같은 것을 보면 똑같은 생각만을 하게 되는 우리를 볼 수 있어. 그에 대해 N[앤]은 다른 생각을 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봐. 어쩌면 ‘모두가 똑같은 생각’은 우리의 ‘진짜 생각’이 아닐지도 몰라. 물론, 여기에 나왔던 ‘또 다른 시선’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야. 단순히,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런 생각, 특히 ‘여성주의’를 통해 보는 시선이 있을 수 있고 그 시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거지.
행복한 경험, 여성주의!
여성주의, 그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보다 행복하기’ 위한 시선이라고 할 수 있어. 신식 씨의 ‘장 보러 가는 날’을 보면, 장을 본다는 행위를 통해, ‘다른 누군가가 되어본다는 것’은 무척이나 좋은 경험일 수 있지. 단순히 ‘장을 보는 여성뿐만 아니라, 장을 보는 자취생 혹은 홀아버지’의 역할까지 ‘되어보는 것’이 아닐까? 그 속에서 ‘장을 보는 사람’에 대해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또한 꿈의 택배 씨의 ‘밥상 위에 평화가’라는 글을 보면 요리를 하는 것, 그리고 밥을 함께 먹는 다는 것의 평화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여기서는 밥과 요리가 단순히 생존을 위한 ‘밥’이 아니고, 너무나도 고단한 ‘가사 노동’의 일부인 요리가 아닌, 함께하는 ‘밥’이고 즐거운 요리인 거야. 그리고 그 속에 담긴 평화를 바라보면서 행복할 수 있는 거지. 이렇게 여성주의로 보는 시선은 ‘불편한 세상’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행복하게 도와주기도 해. 그렇기에 이렇게 N[앤]이라는 저널을 내면서 ‘여성주의’를 사람들과 나누려는 하는게 아닐까?
딱 부러지는 정답보단,
유쾌한 질문을 날리는 N[앤]이 되기를!
세상에는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참 많아. “내가 말하는 이게 정답이요!”라면서 자신을 따르라는 수많은 사람들. 그런데 그 속에서는 우리가 진정 원하는 ‘정답’이 없다고 느껴.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많은 정답보다는 유쾌한 질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질문’을 날리는 역할이 바로 N[앤]이라고 생각해. 그러한 점에서 이번 N[앤] 2호에 담긴 질문들은 정말 매력적이었어. 여성주의라면 ‘이럴 거야’ 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다양한 ‘여성주의’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기존의 시선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또 다른 매력적인 시선’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N[앤]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상, 나의 길-다란 댓글을 마치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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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나다운 것을 긍정하기 | 2008/05/19 18:49 | DEL
여성주의저널 n[앤]은 다양한 개인과 단체들로부터 받은 후원금으로 재정을 100% 채우고 있습니다. 많은 후원 부탁드리구요, 받아보고 싶으신 분은 덧글을 남겨주시거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후원계좌 : 국민은행 233001-04-139527 예금주 김이민경(여성주의저널앤) |
2007/12/07 00:56
[읽기]
저널(journal)의 한층 돋보였던 앤 창간호
성공회대에서 <여성주의 저널, n[앤]>의 창간호가 드디어 나왔다. 창간 준비호가 나올 때가, 5~6월쯤이었으니까 한 6개월 만에 나온 것이다.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땐, 놀랐다. 창간 준비호에 비해 '책'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두께나, 디자인, 표지 같은 면에서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변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더욱 '매력적인' 앤을 들고 펼쳐보기 시작했다.
이번 창간호에서는 '군사주의'를 특집주제를 잡고, 편집위원회의 글들의 주제를 일치시켰다. 또한, 편집위원회 말고도 다른 이들과 함께 한 [좌담회]와 『대한민국은 군대다』의 저자 권인숙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실었다. '군사주의'라는 주제 안에서 많은 이야기가 글 - 좌담회 - 인터뷰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좋았다. 창간준비호의 '수다' 분위기에서 '저널'로의 변화가 한층 느껴지는 창간호다.+_+
앤(n), 창간호를 읽고 맴도는 3가지 생각.
앤을 읽고 그 속에서 말해졌던 많은 생각 중, 3가지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첫 번째는 '삶의 안보'에 관한 문제다. 오로지 국가 혹은 민족의 관점에서만 안보를 논하는 것은 각 공동체의 혹은 각 개인의 차이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고, 결국은 안보의 경험을 표준화하고 획일화한다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안보의 경험과 인식 속에서 우리가 자연스레 여겨왔던 '국가의 안보'는 실은 '주입' 받은 것에 불과한 걸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여성, 특히 군대에 애인이 있는 여성은 '군대 간 남성'에게 감정의 노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군대 간 애인에게 미안한 감정, 빚진 마음을 가지고 길고 긴 이야기를 계속 들어준다던가, 위문편지를 계속 보내주고, 헤어짐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봐야 하는 현실이 특이했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징병제'라는 것도 결국은 '징병' 당하는 이뿐만 아니라 그 주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세 번째는 『대한민국은 군대다』의 저자, 권인숙 선생님의 인터뷰 중에서 나온 부분이다. 군대라는 곳이 서열을 맺는 것에 대해, 약자와의 관계를 맺는 것에 훈련받는다는 점이다. 철저하게 서열을 공고히 맺게 하고 약자와의 관계를 매우 '군사'적 (혹은 '마초적'?)으로 맺게 한다는 점에서 날, 섬뜩하게 했다.
다양하고 유기적인 여성주의 이야기가 되었으면….
여성주의는 그 특성상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이미, 여성주의 자체는 한정된 생각과 인식의 틀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앤에서 그 특성을 잘 살려 삶에 대한 '다양한' 모습들을 썼으면 좋겠다. 동시에, 한 권의 책에서 쓰인 모든 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단순히 '여성주의'의 다양한 이야기만 풀어놓아서는 저널의 한계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 유기성이 '여성주의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과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만들어 낸다면 앤은 정말 '매력적인' 저널이 될 것이다. :D
이번 창간호에서는 '군사주의'를 특집주제를 잡고, 편집위원회의 글들의 주제를 일치시켰다. 또한, 편집위원회 말고도 다른 이들과 함께 한 [좌담회]와 『대한민국은 군대다』의 저자 권인숙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실었다. '군사주의'라는 주제 안에서 많은 이야기가 글 - 좌담회 - 인터뷰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좋았다. 창간준비호의 '수다' 분위기에서 '저널'로의 변화가 한층 느껴지는 창간호다.+_+
앤(n), 창간호를 읽고 맴도는 3가지 생각.
앤을 읽고 그 속에서 말해졌던 많은 생각 중, 3가지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첫 번째는 '삶의 안보'에 관한 문제다. 오로지 국가 혹은 민족의 관점에서만 안보를 논하는 것은 각 공동체의 혹은 각 개인의 차이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고, 결국은 안보의 경험을 표준화하고 획일화한다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안보의 경험과 인식 속에서 우리가 자연스레 여겨왔던 '국가의 안보'는 실은 '주입' 받은 것에 불과한 걸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여성, 특히 군대에 애인이 있는 여성은 '군대 간 남성'에게 감정의 노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군대 간 애인에게 미안한 감정, 빚진 마음을 가지고 길고 긴 이야기를 계속 들어준다던가, 위문편지를 계속 보내주고, 헤어짐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봐야 하는 현실이 특이했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징병제'라는 것도 결국은 '징병' 당하는 이뿐만 아니라 그 주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세 번째는 『대한민국은 군대다』의 저자, 권인숙 선생님의 인터뷰 중에서 나온 부분이다. 군대라는 곳이 서열을 맺는 것에 대해, 약자와의 관계를 맺는 것에 훈련받는다는 점이다. 철저하게 서열을 공고히 맺게 하고 약자와의 관계를 매우 '군사'적 (혹은 '마초적'?)으로 맺게 한다는 점에서 날, 섬뜩하게 했다.
다양하고 유기적인 여성주의 이야기가 되었으면….
여성주의는 그 특성상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이미, 여성주의 자체는 한정된 생각과 인식의 틀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앤에서 그 특성을 잘 살려 삶에 대한 '다양한' 모습들을 썼으면 좋겠다. 동시에, 한 권의 책에서 쓰인 모든 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단순히 '여성주의'의 다양한 이야기만 풀어놓아서는 저널의 한계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 유기성이 '여성주의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과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만들어 낸다면 앤은 정말 '매력적인' 저널이 될 것이다. :D
책갈피
1.
"안보 개념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 안보는 안보를 생각하는 사람이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정의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시골 지역 여성들에게 안보문제는 환경에 대한 안보 즉, 자신과 가족들의 일상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환경이 오염되고 일상이 파괴될 때, 이 여성들에게는 이것이 안보위협을 뜻할 것이다.또 가난한 지역에 사는 사람에게 안보는 자연재해에 대한 공포를 뜻하기도 한다. 자연재해로부터 피해가 그들의 안보를 위협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보는 일상 속에서 폭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안전한 생활을 뜻할 수도 있다. 여성들이 성폭력의 위험 없이, 폭력의 두려움 없이 사는 것이다. 또, 성폭력 피해자가 다시 피해를 받는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_ 엘렌 엘스터
-윤정은, 「페미니즘이 말하는 안보」,『여성주의 저널, 일다』, 2005년 6월 28일
2.
"내게도 이 역할은 너무나 당연해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 역할을 하고 싶은지 아닌지, 이 불편함은 무엇인지 의문을 갖기는 커녕 인식하지도 못했다. 군대에 간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면 수신자 부담이든, 다른 사람과 함께 있든,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든, 밥을 먹고 있든 최대한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별로 할 말이 없어도 끝까지 성실하게 매번 힘들다는 애기 들어주면서, 안됐다고, 몸 건강하라고 있는 걱정 없는 걱정 다 해주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런 억지스러움이 나는 자연스러웠다. 의무를 지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도 군대에 간 친구가 휴가를 나와서, 혹은 군대에 다녀온 남성이 군대 이야기를 꺼냈을 때, 말도 안되는 애기에는 억지로 웃느라고, 힘드었다는 애기에는 동정어린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화제를 돌리자고 말도 못할 만큼 군대 얘기만 나오면 나를 수동적이게 만들었던 것은 괜히 내가 빚을 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그가 대신 더 많이 하게 된 것 같아 괜히 미안했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금기였다. 그의 경험은 곧 국가적 경험과 일치하고, 그런 그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국민 된 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그의 경험과 그가 경험을 계속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나타내거나 반감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국가에 대항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날래,「의무를 지지 못한 자의 의무」,『앤(n)』, 창간호(2007.11), 36~37p
3.
"또한 중요한 점은 군대라는 곳이 서열을 어떻게 맺는가가 중요한지를 알려주고, 약자와의 관계를 알려주는 곳이죠. 사회의 '약자층'으로 구성되는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남자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다룰지를 2, 3년 동안 훈련받는 지를 모르고 축구 이야기만을 듣고 있다는 것만이 위험한 일이죠."
- 권인숙, 꿈의 택배, 우공,「[인터뷰]『대학민국은 군대다』의 저자 권인숙 선생님을 만나다!」,『앤(n)』,창간호(2007.11), 101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