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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해당되는 글 18건
2008/11/08 19:36
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소담출판사


은사자들

 책의 얼굴인, 첫 페이지. 그 속에는 '은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존 사자들과 달리, 색소가 희미한 은사자. 그 '다름' 때문에 사자들 무리에서 따돌림을 받지요. 그래서 은사자들은 그들끼리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에도 등장하는 '은사자 이야기'는 무츠키를 비롯한 '게이'들의 삶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맞아요. 쇼코의 남편인 무츠키는 '게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사귄 '곤'이라는 애인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내'인 쇼코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버럭, 화를 내었을까요? 당장,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윽박질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츠키의 애인인 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종종, '곤 씨랑 고양이가 싸운 이야기'등을 반복해서 들을 정도지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시나요?

사실, 무츠키만큼 쇼코도 '다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알코올과 함께 사는 쇼코. 그동안 수없이 정신과에 다녔었지만, '알코올 중독'이 아니며, '정상적인 범위를 넘지 않는 정신병'이라는 이상한 진단만 받습니다. 이러한 사정이기에 쇼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아내와 호모 남편, 참 내, 그야말로 끼리끼리다."

 기묘한 두 사람. 아니, 무츠키의 애인인 곤까지 합쳐서 세 사람의 이야기는 기묘하고도 기묘합니다. 이들은 조금, 다릅니다. 쇼코까지 포함해서요. 마치, 무리에서 떨어져 사는 은사자들처럼 말이죠. 책의 말미에 무츠키 아버지는 쇼코에게도 '은사자의 모습'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쇼코가 '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무리에서 떨어진 은사자의 모습'에는 일치하지요. 이렇듯, 『반짝반짝 빛나는』은 은사자들의 평범한 일상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단지, 은사자가 아닌 사자들이 볼 때는'기묘'하게 보일 뿐이죠.

사랑이 뭘까?

 저는 이 '은사자들'의 삶을 보면서, 그동안 꼭꼭 눌러두었던 질문이 튀어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바로, '사랑'에 대한 질문입니다. 기나긴 세월동안 수많은 이들은 이 질문을 했을 테죠. '사랑이 뭘까?'. 지금쯤은 알 법도 한데, 정말이지, 저는 모르겠어요. 영화 '아는 여자'에서 '동치성'은 말합니다. "난 첫사랑이 없다." 그 동치성의 마음과 비슷하달까요. 지금까지, 누군가를 '사랑했었노라'라고 성급히 말할 수 있는 '믿음'은 없습니다. 다만, 그게 '사랑'이 아니었을까고 되묻는 '행동'만이 남았을 뿐이죠.

 저는 궁금했습니다. 쇼코와 무츠키와의 관계는 사랑일까요 아닐까요. 사회적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겠지요. 무츠키는 쇼코를 한 번도 안지 않았고, 그 흔한 키스조차 안 했을 뿐더러 무엇보다 무츠키는 '게이'이니까요. 처음의 그들은 참, '쿨'합니다. 서로 애인을 자유롭게 갖는 결혼 생활, 무츠키가 밤늦게 들어오지 않아도 기다리지 않는 쇼코, 쇼쿄에게 애인을 권하는 무츠키…. 이러한 삶은 쇼코의 독백에서 잘 드러납니다.

[각주:1]"이런 결혼 생활도 괜찮다, 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다. 불현듯, 물을 안는다는 시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야기가 흐를수록 '쿨함'은 '애매함'으로 변해갑니다. 어느 날 쇼코는 새벽까지 무츠키를 기다리기도 하고, 쇼코를 생각해서 쇼코의 옛 애인을 만나게 한 '무츠키'를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낍니다. 물론, 무츠키의 '게이'인 모습을 원망하거나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무츠키의 '애인'인 곤도 좋아하고, 무츠키가 '곤'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는 쇼코이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쇼코는 '게이'인 무츠키를 좋아하는 겁니다. '게이'부분을 뺀 무츠키가 아닌, '곤'을 애인으로 둔 '게이 무츠키'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감정을 '쿨함'이라 표현할 순 없을 겁니다. 마침내 쇼코는 이러한 독백을 합니다.

[각주:2]"나는 그저 무츠키와 함께 둘만의 생활을 지키고 싶을 뿐이다. 잃을 것이 하나도 없었어야 할 우리의 결혼 생활. 나는 무츠키를 만나기전까지는 무언가를 지킨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 보지 않았다."

 무츠키와 그 애인인 곤은 어떨까요? 무츠키는 자상합니다. 크리스마스날, 쇼코는 선물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비해, 무츠키는 항상 빼먹지 않습니다. 게다가 항상 쇼코가 좋아하는 것을 선물하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쇼코가 계속 우울함에 빠져 있을 땐, 쇼코의 옛 애인을 만나게 해주기까지 하지요. 물론, 그 때문에 쇼코는 무척 가슴 아퍼하지만…. 무츠키는 쇼코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함께 사는 가족'으로서 쇼코를 좋아합니다.

 곤도 쇼코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곤의 입장에서 쇼코는 '애인의 아내'입니다. 얼마든지 질투를 할 수 있는 위치이지요. 그런데도 쇼코와 곤은 사이가 좋습니다. 그냥, 친절한 사이가 아닌, 함께 있으면 편한 사이랄까요. 쇼코는 무츠키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곤을 불러 셋이 함께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합니다. 쇼코에 있어서 '곤'이 없는 무츠키는 무츠키가 아닙니다. 무츠키를 좋아하는 만큼, 무츠키와 함께하는 곤도 좋아하지요. 이런 쇼코를 곤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이 기묘한 풍경에서 '사랑'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알 듯 모를 듯, 애매한 감정만이 흐릅니다. 어쩌면, 이들의 감정 속에는 '은사자가 아닌 사자'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은사자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쇼코의 독백 속에 그 힌트를 알 수 있습니다.

 [각주:3]"무츠키처럼 선량한 사람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가족으로서의 자상함과 우정, 그저 그뿐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때로 견딜 수없이 괴로워진다. 온몸이 애처로운 과일처럼 되어버린다."

 [각주:4]"무츠키와 잘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태연하고 부드럽고 자상한 무츠키를 견딜 수 없다. 물을 안는 기분이란 섹스가 없는 허전함이 아니라, 그것을 서로에 대한 콤플렉스라 여기고 신경을 쓰는 답답함이다."

 쇼코에게 있어서 무츠키의 '가족으로서의 자상함과 우정'은 자신을 괴롭게 합니다. 그에 대해 두 번째 독백에서 잘 나와있습니다. '섹스가 없는 허전함이 아니라, 그것을 서로에 대한 콤플렉스라 여기고 신경을 쓰는 답답함'으로 구체화된 무츠키의 자상함이 쇼코는 괴롭습니다. 다시 말해,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쇼코는 항상 말합니다. '그냥 이대로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쇼코는 무츠키와 함께 있는 삶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약간의 무리'를 해서라도 부모님을 '거짓'으로 납득시키고 무츠키와 함께 있으려 합니다. 물론, 곤도 함께요.

 이 기묘한 이야기. 사랑인지 아닌지 알쏭달쏭한, 사랑이 무엇인지 질문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마지막은 더욱 기묘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무츠키와 함께 사는 쇼코. 그들이 사는 아파트 바로 아래층에는 무츠키 애인인 곤이 살고 있습니다. 쇼코는 남편 그리고 남편의 애인과 함께 살며, 무츠키는 아내 그리고 애인과 함께 살며, 곤은 애인과 애인의 아내와 함께 살아갑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끝이 나는 지금, 아직도 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다만, 저 기묘한 풍경 속에 '사랑'이 어디엔가 놓여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




어쩌면, 이제는,
사랑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보다
사랑이 어디에 놓여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해야 되는 걸까요?






  1. 『반짝반짝 빛나는』(소담출판사, 56p) [본문으로]
  2. 『반짝반짝 빛나는』(소담출판사, 171p) [본문으로]
  3. 『반짝반짝 빛나는』(소담출판사, 183p) [본문으로]
  4. 『반짝반짝 빛나는』(소담출판사, 183p)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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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0 18:18
불행이란 놈은 친절하게도

인간의 상식을

불행 수준으로 떨어뜨려

불행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준다.

- 최규석, 대한민국 원주민 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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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0 18:04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 - 6점
스터즈 터클 지음, 이정득 옮김/이매진


진한 삶의 내음이 풍기는 책,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

 진한 삶의 내음을 맡아본 적이 있는가?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고, 꽉 채워져 있으면서도 텅 비워버린 삶을 떠오르게 하는 내음…. 나는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를 읽으며 그 지독한 내음이 느껴졌다. 아찔하며 황홀한 그 무엇….

 재즈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마치, 흔해빠진 눈물의 사연을 생각하게 한다. 따스한 빛이 비치지 않는 세상의 그늘, 그윽한 담배연기와 씁쓸한 술의 내음이 가득한 술집. 재즈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마치, 소외받는 자들의 왕이자 친구인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처럼….

 예술은 삶 없이는 태어날 수 없다. 재즈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말의 의미는 재즈가 태어났던 곳은 곧, 연주자들의 삶이었다는 사실을 담아낸다. 따뜻한 양지의 반쪽, 그들은 술집과 그 속에 담긴 지치고 져버린 쓴맛에 익숙했다. 흥이 나는 재즈이든, 조용히 마음을 훑어가는 재즈이든 그 속에는 쓴맛이 담겨 있었다.

 끈적거리는 삶의 애환. 이런 게 정말, 재즈이자 삶이라는 걸 스터즈 터클은 보여준다. 그 누구보다 재즈처럼 살아갔던 13명의 연주자의 삶을 통해서…. 당신이 재즈를 알든지 모르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재즈가 담았던 삶의 그 무엇을 느낄 수가 있다면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에서 삶, 그 자체인 재즈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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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6 20:45
 평화롭다는 것은 종종 수동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평화로운 상태는 갈등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잠깐 동안만 생각해 보아도 갈등이 없는 세계는 따분하고 단조로운 곳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평화 교육은 갈등이 종종 성장을 위한 도약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평화교육은 갈등의 제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창의적으고 덜 폭력적인 방법들을 모색한다.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 좀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새로운 해결방법을 찾게 만드는 중요한 자극이 될 수 있으며 평화로운 환경을 조성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활을 한다.

 물론 항상 새로운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역동적이고, 매력적이며, 흥미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평화란, 각 개인이 현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 상황과 관련을 가질 수 있는 비폭력적이고 창의적인 방법들을 모색하는 능동적인 과정인 것이다.

- 『평화교육의 이론과 실천』 (DAVID HICKS, 고병헌 역) 1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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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Icon 아르헨티나백브레이커 | 2008/08/16 21:01 | PERMALINK | EDIT/DEL | REPLY
동의한다. 진정으로 평화로운 방법이란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평화로워야 하는 것이지.
어쩌면 평화는 가장 치열해야하는 것일지도.
BlogIcon 여울바람 | 2008/08/16 23:51 | PERMALINK | EDIT/DEL
그런데 그런 평화를 상상하는 이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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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6 15:59
네 멋대로 써라 - 10점
데릭 젠슨 지음, 김정훈 옮김/삼인


책 한 권에 나의 마음을 빼앗기다. +_+

 지금껏 읽었던 책 중에서 너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것이 한 권이라도 있었니? 나는 있었어. 바로, 데릭 젠슨이 쓴『네 멋대로 써라』이지. 내가 이 책과 '처음' 만났을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어. 하루하루를 잘난 대학교를 위해 고귀한(그러나 속은 탐욕으로 가득한) 희생을 하라고 외치는 시스템에 넌덜머리가 난 고등학생 말이야. 스스로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는 배움에서 탈출해서 내가 원하는 독서를 통해, 잠시나마 괴로움을 잊어가면서 성장할 때였지. 그러한 독서 중에서 만난 책이 『네 멋대로 써라』였어.

 내가 학생일 때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듯 이놈의 잘난 교육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부정하며, 괴롭히지. 나도 그랬어. 끊임없이 나를 부정 당하는 곳에서(혹은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되는 것을 긍정하는 곳에서) 정말 미칠 것만 같았어. 그런데 그렇게 조금씩 파괴되어가는 나의 마음을 한순간에 두근거리게 바꿔버린 거야. 고작, 글쓰기 책 한 권이 말이야. 그리고 난 그 두근거림을 믿고 지금, 여기까지 왔어. 어쩌면, 나의 미래가 바뀌어버린 건지도 모르겠어.

삶은 글쓰기의 바탕이고 글쓰기는 삶의 바탕.
고로, 글쓰기 책은 삶에 관한 책.

 어떤 책이기에, 미래까지 바꾸게 하였다고 하는 것인지 궁금하지? 요즘에 흔하고 흔한 어떻게 하면 '논술 시험'에서 점수를 높게 만들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력서를 폼나게 쓸 수 있는지에 관한 책이었다면 절대 나에게 두근거림을 줄 수 없었겠지. 이 책에서 글쓰기는 삶이고, 삶은 글쓰기다. 라는 말이 있어. 다시 말해서, 이 책은 글쓰기를 매개로 해서 우리의 삶과 배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거야.

 우리의 끔찍한 문화 속에서 배움은 사람이라는 기계의 프로그램 주입이 되었고, 그 속에서 글쓰기 교육은 정말 따분한 수업에 불과해졌지. 그런데 데릭 젠슨은 자신이 대학교에서 혹은 교도소에서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완전히 다른 방식의 글쓰기 교육을 하게 되지. 1학기 정도의 글쓰기 수업(그리고 삶 수업)에 대해서 주제별로 써놓은 책이 『네 멋대로 써라』의 구성이지. 물론, 지겨운 수업 내용 보고서와는 차원이 달라.

 글이 섹스보다 재밌어야 한다느니, 가장 중요한 글쓰기 연습은 기성세대와 구조에 Fuck 을 날리는 것이라느니 하며 유쾌한 글쓰기 수업을 하지. 그리고 정말 자신이 누군지 알아야 하고,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되며 그것은 오로지 스스로만이 알고 할 수 있는 거라 말해. 그리고 글쓰기와 삶 교육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멋진 삶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하지. 그의 글과 수업 내용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두근거림이,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이,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솟아오르지. 한마디로, 짜릿해! >_<

지긋지긋한 이 문화에 지쳐버린 당신을 위한 책

 세상을 살아가면서 도저히 이 문명과 문화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그 속에서 오로지 자신이 바꾸는 것이, 적응하는 것이 올바른 답인 양 강요하고 있을 때, 그래서 정녕 자신이 미친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할 때 『네 멋대로 써라』를 읽어봐. 이 책은 너에게 한마디 하겠지. "여러분들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이 문화가 미친 거에요." 그 무엇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이 되고 그것이 진정 좋은 것임을 유쾌한 문장으로 너에게 알려줄 거야.

 그뿐만이 아니지. 처음 이 책과 만날 때는 '삶'에 대한 이야기에 매료되어서 다른 부분을 미처 살피지 못했지만, 이제는 보이더군. '글쓰기' 부분이 말이야. 삶과 글쓰기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듯이 이 책은 진정한 글쓰기에 대해서 안내를 하고 있어. 단순히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글쓰기가 아닌 우리의 삶을 위한 글쓰기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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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gIcon 루인 | 2008/08/16 17:43 | PERMALINK | EDIT/DEL | REPLY
꺅. 이 책 너무 좋아요. >_<
전 정+희+진쌤이 사석에서 이 책을 얘기해서 읽었어요.
읽고 어찌나 재밌고 기쁘던지요. 흐흐
BlogIcon 여울바람 | 2008/08/16 18:06 | PERMALINK | EDIT/DEL
정말, 짜릿해요.+_+ㅋㅋ
BlogIcon 아르헨티나백브레이커 | 2008/08/16 21:01 | PERMALINK | EDIT/DEL | REPLY
빌려주면 안될까??????
BlogIcon 여울바람 | 2008/08/16 23:52 | PERMALINK | EDIT/DEL
1주일 이내로 독파 가능?ㅋ
BlogIcon 아르헨티나백브레이커 | 2008/08/18 03:58 | PERMALINK | EDIT/DEL | REPLY
가능합니다....

아 그리고 블로그 과외좀 부탁해
더미 | 2008/09/23 16:40 | PERMALINK | EDIT/DEL | REPLY
결국 내 독해력이 부족한건가? 흥미롭긴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지루하다..
BlogIcon 여울바람 | 2008/09/23 19:46 | PERMALINK | EDIT/DEL
글쓰기에서 보는 게 아니라, 사회를 보는 시각에서 공감을 느낀다면 무척 재미있지만, 공감을 느끼지 못하면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지루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혹시 저를 아는 지인?)
더미 | 2008/09/24 11:13 | PERMALINK | EDIT/DEL | REPLY
사회를 보는 시각에서 공감을 느끼고 글쓴이가 말하려는 내용도 이해가 가지만
잡담, 혹은 정말 필요치 않은 쓸데없는 수다가 대부분인 듯.
정말 이건 글쓰기에 대한 잡담에 불과해 보인다.
진짜.. a4 한장에 쓸 내용을 이렇게 지루하게 늘어지는 글을 쓴 저자도 혹은 번역자도 정말 최악이다..
물론 내 주관적인 관점에서 말이다.. (지인은 아닐꺼에요;;)
BlogIcon 여울바람 | 2008/09/24 18:51 | PERMALINK | EDIT/DEL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저도 처음에는 뭐 이런 글이 있나?-_-; 싶었죠.ㅋ 주절주절 수다 속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끌어내는게 데릭 젠슨의 글쓰기 법이라 생각됩니다. 데릭젠슨의 두꺼운 책 '거짓된 진실' 또한 내용은 다르지만, 글쓰는 형식은 비슷해요.ㅋ 번역자체의 문제보다는 원글의 형식이 워낙 특이한 것도 한 몫 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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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31 21:40
아이, 로봇 - 6점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우리교육


신화 속에 있는 '지금 여기의 우리'

 신화를 읽어보적 있어? 요즘 사람들은 다 아는 그리스 로마 신화 부터, 북유럽 신화 그리고 한국의 많은 신화까지…. 신화는 보통 지금과는 멀리 떨어진 과거에 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완전 '안드로메다 성운'의 이야기라는 거지. 그런데도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듣거나 읽고 있어.

 왜 그럴까? 그건, 신화 속에 '지금 여기의 우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신화 속에 나오는 수 많은 신과 거인 그리고 요정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야. 이것은 마치, 유행가 속에서 우리 사연을 상상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창조자 인간, 창조물 로봇
그들의 새로운 신화

 뜸금없이 웬 신화 이야기냐고? 그건, 내가 『아이, 로봇』을 읽으면서 '새로운 신화'를 읽는 기분이였기 때문이야. 『아이, 로봇』은 그저 미래에 로봇을 등장시킨 평범한 소설이 아니였어. 각각의 로봇에 대한 '에피소드'형식이 엮어진 책은 마치 예전에 내가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 라던지 북유럽 신화를 떠올리게 했지. 차이가 있다면 창조자가 인간이고 창조물이 로봇이라는 차이 일뿐이야.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을 단순히 '기계'를 넘어서서 '창조물'로 봤어. 우리가 숱한 신화에서 등장한 '인간'처럼 말이야.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지만, 인간이 그저 '만들어진 인형'이 아니었듯 『아이, 로봇』에 나오는 로봇들은 하나같이 '인형'이 아닌 '톡톡 튀는 창조물'로서 존재하고 있어. 신을 우습게 보는 인간처럼 인간을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기도 하고, 신을 속이는 인간처럼 인간을 속이는 로봇도 있지. 인간에게서만 보았던 모습을 우리가 만든 '로봇'에서 보고, 그 모습에 신이 인간에게 당황했던 것처럼 인간이 로봇에 애를 먹는 모습은 흥미롭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해.


로봇을 위한? 인간을 위한!
미래의 신화 『아이, 로봇』

 그러한 모습을 계속 읽고 있노라니, 마치 로봇의 신화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어. 먼훗날, 『아이, 로봇』을 읽고 로봇이 자신의 머나먼 과거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까? -.-? 뭐, 그건 로봇에게 맡기고 나는 '인간'으로써 이야기 해보겠어. 내가 아까 위에서 마치 로봇이 신화 속 '인간'의 역활을 한다고 했지? 그렇다는 말은 로봇 이야기 속에서 결국,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볼 수 있다는 거지.

 그 뿐만이 아니야. 『아이, 로봇』속에서 로봇을 우리의 한 단면으로 본다면 그것을 상대하는 '인간' 또한 우리의 한 단면이지. 결국, 소설을 읽으면서 각각 다른 쌍방의 우리를 마주보게 되. 그것은 '신과 인간'의 신화보다도 직접적으로 '인간'에 대해서 돌아보게 만든다는 거야. 즉, 정말 '재미'있으면서 매우 '뜨끔'한 이야기라는 거지. 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인간들의 세상인 '지금 여기'에서도 누군가는 '창조자'의 위치에 있고, 누군가는 '창조물'의 위치에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로봇에 대한 당신의 태도가 그 답을 대신할 지도 모르지……. 여태까지의 창조물로서의 관점이 아닌, 창조자로서의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멋진 미래의 신화. 그게, 『아이, 로봇』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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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30 19:38
데미안 - 6점
헤르만 헤세 지음, 정소진 옮김, 임영태 감수/리베르


성장에 대한 이야기, 『데미안』

 헤르만 헤세의『데미안』은 성장에 대한 이야기야. '성장'이라고 하니, 머릿속에서는 그동안에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봤었던 '성장 공식'이 떠오르지 않아? (특히, 소년만화물에서 지겹게도 반복되는 레퍼토리지.) '이제는 제법 '고전 소설' 쯤에 들어가는 『데미안』이라고 하지만 과연 다를 게 있을까?'라는 의심쩍은 눈초리는 잠시 걷고 내 이야기를 들어봐. :) 성장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순수하고 연약한 존재야. 쉽게 말해, 온실 속의 화초 혹은 마치, '거대한 모험'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의 만화 주인공 같은 거야. 그리고 그건, 바로 우리가 '가정의 따뜻한 품 안'에서 벗어나기 직전의 모습이기도 하지.


따뜻한 세계 속에서 안락했던 싱클레어, 추악한 세계에 발을 빠뜨리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이제 '낯선 곳으로의 모험'으로 성장에 대한 발걸음을 내디뎌. 물론, 이것은 '쉽고 편하고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지.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우리가 어렸을 적에 흔히 보았던 불량학생'에 의해 '낯선 세상'에 발을 빠뜨리게 돼. 싱클레어는 지금,(이미 많이 커버린 우리에게는 너무나 '사소한 일'에(간단히 말하면, 거짓말 혹은 거짓된 맹세인 거지.) 크로머에 협박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면서 '낯선 세계, 추악한 세계'에 조금씩 다가가게 돼. 그러면서 점점 그동안의 '따뜻한 세계'로부터 멀어지는 자신을 감당하지 못해 괴로워하지.

 지금 보면 참으로 '바보'스럽지만, 싱클레어의 그 마음에 공감이 가는 것은 우리의 어렸을 적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일꺼야. 사소한 일에도 큰 죄를 지어서 벌을 받고 비난을 받을까 조마조마하며 떨었던 '어렸을 적'의 기억이 다들 있지? 그때는 지금보다 '순수'했기에 그렇게 아파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 이제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반응이 없을 정도로 무뎌진 양심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낯선 세계'와 만나고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에(금지에 대한 욕망처럼, 싱클레어는 '낯선 세계'가 마냥 싫은 게 아니었던 거지.) 괴로워하는 싱클레어는 '데미안'이라는 구원자를 만나게 되어서, 크로머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나지. 그런데 크로머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 데미안은 이전의 '따뜻한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어. 데미안 덕분에 다시, 마음껏 '따뜻한 세계' 속에 파묻혀서 살아갈 수 있었지만, 정작 데미안은 '따뜻한 세계 혹은 기존의 세계'와는 다른 이야기를 해. 그렇기에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동경하면서, 그의 세계에는 다가가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 그러다가 데미안이 여행을 떠나면서 서로 헤어지게 되지.

사랑받는 소년에서, 세상에 조소를 내뿜는 탕아가 된 싱클레어

 크로머로로 인해, 낯선 세계에 발을 담가보았던 싱클레어는 그 '매혹적인 모습'을 잊지 못해. 그동안에 자신이 있었던 '따뜻하고 거룩하며 안정적인 세계'에서 조금씩 '낯선 세계 혹은 어둠의 세계'로 다가가지. 그리고는 어느새, 세상에 대해 냉담하고 감정이 무뎌진 인간이 되는 거야. 그렇게 변하는 자신을 싱클레어는 이렇게 말해.

  "소년의 사랑스러움은 내게서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들이 나를 별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으며, 스스로도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어느샌가, '따뜻한 세계'의 일원에서 '차가운 세계'의 일원으로 바뀐 싱클레어. 그는 점점 더 '따뜻한 세계'에서 멀어지며 생활을 하게 돼. 누구보다 술을 잘 마시고, 각종 음담패설을 내뱉고, 세상에 대한 조소를 내뿜는 탕아가 된 거야. 학교에서 쫓겨나기 직전까지의 행동을 보이며, 소위 또래들의 '영웅'이 되며 살아가지. 마치, 어느 만화에서 보았던, 냉소적으로 세상을 보며, 비웃는 '간지나는 캐릭터'처럼. (오! 옛날에는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싱클레어는 우연히 '데미안'을 만나게 돼. 오랜만에 데미안을 만나, 자신이 이제 '어리숙한 싱클레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고 하는 듯이, 술집에 가지. 그러면서 자신은 이제 술도 마음껏 마시며 호탕하게 산다는 것을 보여주지. 여기서 데미안은 이렇게 한마디 하고 사라져.

"네가 무슨 목적으로 잔을 비우고 있는지에 대해서 너와 나 둘 다 모르고 있단 말이야.(…)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 내부에는 모든 것을 알고, 원하는 더 잘 해내는 존재가 있단 말이야.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지극히 유익한 일이지."

 데미안은 '탕아적 삶'은 정말 싱클레어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일러준 것이지. 우리 주변에도 '탕아적인 모습을 멋있다고(간지나잖뉘?-_+ㅋ)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아. 마치, 세상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듯이 행동하며 세상을 냉소적으로만 바라보는 태도를 지닌 수많은 이들! 그들은 정작 '자유롭고 호탕하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내면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을 더욱 냉소적으로 만드는 데 보태고 있을 뿐이야.

 자, 다시 『데미안』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의 주인공인 '싱클레어'! 그는 이제, '낯선 모험의 세계에 빠지고,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까지 왔어. 오! 이제는 각종 '성장 이야기 공식'처럼 다시 '따뜻하고 안락한 세계'로 돌아갈 차례만이 남은 걸까? 흔히,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그 모든 것은 꿈이었다'라는 방식처럼 말이야.

천사인 동시에 악마인 신, 아프락사스

 만약, '따뜻하고 안락했던 세계'로의 귀환이 성장이라면, 고작 성장이라는 것은 '악마의 유혹'을 꿋꿋이 이겨내서 도로 아름다운 세계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지. 그런데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 헤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사실, 싱클레어는 탕아인 상태에서 데미안을 만나기 전에, 베아트리체라고 이름 붙인 한 여인을 만나게 돼. 직접 만나는 것은 아니고, 바라보기만 하는 건데 그녀는 '과거의 데미안'에 살았던 따뜻하고 안락한 세계의 사람이야. 그녀를 보며 데미안은 다시 되돌아가고 싶어하지. 그러던 와중에 데미안을 만나게 된 거야. 베아트리체에 대한 성스러움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던 탕아였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고 나서 꿈에서 '새'에 관한 꿈을 꾸고 그것을 그리고 나서 데미안에게 보내지. 그리고 데미안에게 답변이 오는 데, 바로 그 유명한 문구가 여기서 나오지.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

 이런 쪽지를 받은 후에 수업 중에 아프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어떤 신성의 이름'이라는 말을 듣고, 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지. 그동안 싱클레어는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갈망도 있지만, '성스럽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 또한 여전히 갖고 있었거든. 그에 대한 고민이 '아프락사스'를 통해 표면화 된 거지. 또한,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라는 음악가를 만나고, 그를 통해 보다 '아프락사스'를 잘 알게 돼. 그렇게 『데미안』의 이야기는 전개되고 나중에는 다시 데미안과의 재회하게 되지. 그리고는 이제 싱클레어는 데미안처럼 '성스러운 세계'나 '추악한 세계'가 아닌, '아프락사스의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지.(더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직접 읽어보시라! :-p )

아프락사스, 성장의 진정한 의미

 그래, 전형적인 '성장 이야기'인 『데미안』은 '따뜻한 나라도 되돌아가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아. 바로, 여기서 『데미안』에 담긴 성장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어. 그건 바로, '아프락삭스'야. 우리는 '성장'하면서 세상이 '따뜻한 자궁' 혹은 '아늑한 가정'같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분명히 세상의 절반은 '아름다운 세계'일지도 모르겠지만 또 다른 절반은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세계'가 분명히 존재하지.

 그렇다고 해서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부정할 필요도 없고, '아름답게 보이는 세계'가 허구라고 주장할 필요도 없지.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져서 '세계'를 이루는 것이고, 그 세계를 상징하는 게 '아프락삭스'인 거야. 그런데 아프락삭스는 '신 혹은 악마' 같은 또 다른 신적인 기준이며 권위일까? 그에 대해서는 『데미안』에 나오는 3개의 구절을 통해 대신 대답해보려고 해.

하나.
"우리는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만 해. 과연 무엇이 허용의 범주에 들고 무엇이 금지의 영역에 포함되는지, 무엇을 스스로 금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둘.
"자신과 남들을 비교해서는 안 돼. 자연이 자네를 박쥐로 만들어 놓았다면,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돼. 인간은 더러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자신을 나무라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 일은 그만두어야 하네. 불을 들여다보고, 구름을 바라볼 때 어떤 예감이 떠오르고 자네 영혼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거든, 자신을 그 목소리에 맡기고 아무것도 묻지 말도록 하게.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님 혹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까 하는 그런 물음이 자신을 망치는 거야."

셋.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즉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무도 없다"

 자, 이제 아프락삭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겠어? 『데미안』에 나오는 아프락삭스는 자신의 '내면'에 있어. 그리고 그 내면의 목소리를 잘 듣고 '자기 자신'으로 되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성장'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뜻해. 어렸을 적에는 '따뜻한 세계'에 묻혀 살면서 그저 그대로 살아갔다면, '낯선 세계'를 만나고 여러 '모험'을 통해서, '자신만의 기준'을 찾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되려고 살아가는 거지. 나는 이것이 『데미안』에 담긴 성장의 의미라고 생각해. 그리고 헤르만 헤세는 그 '성장'을 우리에게 건네고 있어. "어때? 이제 세계를 깨뜨리고 너의 신을 향해 날아가지 않을래?"라면서…….